‘페르소나’(persona)라는 말이 있다. 한 개인이 제 본래 성격과 관계없이 밖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성격을 가리키는 말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심리학 용어는 원래 그리스의 연극에 사용되던 ‘가면’에서 유래했다. 오늘날과 달리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는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늘 가면을 쓰고 연기했다고 한다. 본래의 얼굴을 감추고 겉으로 다른 얼굴을 내세운다는 점에서 연극의 ‘페르소나’와 심리학의 ‘페르소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는 왜 가면을 사용했을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먼저 고대에는 배우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배역을 담당하다 보니 그 인격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가면을 사용해야 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종교적 제의의 흔적인지, 여성이 배우가 되어 무대에 오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여성의 역할도 남성이 해야 했기에 배우와 배역의 성차를 지우기 위해서도 가면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면은 극적 효과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원형극장에서는 무대와 관객석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 거리에서 배우의 표정을 보기란 어렵다. 그러다 보니 과장된 표정을 가진 가면으로 배우의 감정을 전달해야 했다는 것이다. 근대의 연극에서는 가면이 분장으로 대체된다. 여기에도 과장은 남아 있다. 영화라면 접사를 통해 배우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주겠지만 연극의 관객은 배우의 얼굴을 멀리서 봐야 한다. 당연히 분장을 과장할 수밖에 없다.
좀 미심쩍은 가설이긴 한데, 가면이 음향의 효과를 위해 사용됐다는 얘기도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된 몇몇 가면은 입부분이 메가폰의 형태로 뚫려 있다. 이것이 배우의 육성을 증폭시켜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겠다. 고대의 원형극장은 구조상 무대에서 나는 조그만 소리도 관객석의 끝에까지 다 들리게 되어 있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완벽한 음향효과를 내는 구조를 갖춘 무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포와 연민
여러 문화에서 가면이 갖는 신성한 의미를 생각해볼 때, 아마도 그리스의 페르소나는 연극이 아직 종교적 제의였던 시절의 흔적일 것이다. 아득한 고대에 가면은 제의 속에서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주는 장치였을 것이다. 그 제의가 종교적 성격을 잃고 오늘날의 예술, 오늘날의 연극에 가까워지면 애초에 가면이 가졌던 그 신성한 의미 역시 그리스인들의 기억 속에서 망각되고,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실용적 의미로 세속화한 것이리라.
주목해야 할 것은 가면의 예술적 효과다. 흥미롭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시학>에서 비극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로 ‘장경’이라는 것을 든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혹자는 이 말이 가면과 의상을 의미한다고 보고, 혹자는 이 말이 피나케스(pinakes), 즉 무대의 벽에 걸려 세트의 역할을 한 그림까지 의미한다고 본다. 해석은 분분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말은 주로 배우의 가면과 의상을 가리킨 것은 분명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장경을 비극의 ‘요소’로 꼽을 정도로 중시했다는 점이다. 그가 말하는 ‘연민’(eleos)과 ‘공포’(phobia) 효과는 플롯만이 아니라 상당 부분 가면의 효과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문학적 효과만이 아니라 조형적 효과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리스 비극의 가면은 표정이 매우 강렬하다. 이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배우의 강렬한 표정 연기, 혹은 최근 영화에서 강조되는 특수분장의 효과를 생각해보라.
가면을 쓴 것은 디오니소스
영어의 ‘개인’(person)이라는 말은 ‘페르소나’(person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해석을 제공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에 따라, ‘개별의지’, 즉 인간 개개인은 원래 ‘근원의지’에서 갈려나온 것으로 간주한다. 말하자면 탄생 이전에 우리 모두는 우주의 근본적 원리(근원의지) 속에서 한몸을 이루고 있었으나, 개별화(individuation)의 원리에 따라 개인(개별의지)으로 분화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개별자로 태어난 것 자체가 ‘고’(苦)다. 원래 하나였던 의지가 개별의지로 분화되면 서로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갈등의 과정에서 개인들은 서로 증오하고, 상해하고, 심지어 살해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든 연극에서든 이 ‘갈등’이 또한 극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아닌가. 비극의 주인공은 이 갈등을 통해 결국 개인적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는 죽음으로 개별화의 굴레를 벗고 다시 근원적 일자와 합류하게 된다.
주인공이 파멸을 통해 비로소 제 운명을 깨닫는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발견’(anagnorisis)이라 부른다. 니체에 따르면 이때 개별자는 ‘몰아’(ecstasy)의 체험을 한다. 불교에서라면 이를 각각 ‘각성’과 ‘해탈’이라 부를 것이다. 아름다운 아폴론의 세계의 이면에 깔린 것은 ‘개별화 자체가 고통’이라는 무서운 디오니소스의 진리다. 따라서 가면을 쓰고 서로 갈등하는 개인들을 연기하는 것은 디오니소스다. 그야말로 비극의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연극이다
이제는 상투어가 된 ‘인생은 연극’이라는 말은 17세기 지성계의 세계감정이었다. 최근에 그 바로크 감정이 미디어를 통해 되돌아오고 있다. 미디어를 통해 만들어지는 공적 이미지는 현대의 페르소나다. 개인이 가진 본래의 성격은 그 가면 아래로 깊숙이 감추어진다. 아니, ‘본래의 성격’이란 말이 이 시대에 도대체 의미가 있을까? 앤디 워홀은 자신에 대해 알고 싶으면 미디어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라고 했다. 그것이 자신의 전부라는 것이다.
가령 마릴린 먼로의 실명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본래의 인격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은 더 적을 것이다. 하지만 그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우리가 아는 마릴린 먼로는 어차피 미디어가 만들어낸 페르소나가 아닌가. 다시 말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지하철 통풍구 위에서 치마를 내리고, 케네디의 생일날 피아노 위에 걸터앉아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는 백치의 미녀이지, ‘노마 진 모르텐슨 베이커’라는 긴 이름을 가진 여인이 아니다.
미디어가 실재를 사라지게 했다는 보드리야르의 명제를 패러프레이즈하면, 미디어를 통해 가면(persona) 자체가 곧 인격(person)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미지만큼 허망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미디어를 통해 제 존재를 얻은 유명인들의 이미지가 몰락할 때, 그들도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처럼 그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발견’에 도달할까? 그동안 자신을 얽매었던 관리된 이미지의 질곡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몰아의 체험을 할까?
얼마 전에 강연을 갔더니 미디어에서 보는 것과 이미지가 너무 달라 놀랐다고 말한다. 하긴 어디를 가나 듣는 소리이긴 하다. 사나운 논객의 ‘공적’ 이미지와 수줍은 개인의 ‘사적’ 이미지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공적인 이미지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미디어가 내 얼굴에 뒤집어씌운 페르소나라 할 수 있다. 가면을 뒤집어쓰고 하는 그 연기가 얼마나 허망하든 배우는 자신의 연기를 계속해야 한다.
미디어가 깔아놓은 무대 위에서 세계는 다시 한번 거대한 연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