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음악 순위 프로그램에서 언제부터 가사를 보여주기 시작했을까. 자막처럼 가사를 보여주는 건 반대지만 (전 음악도 못 듣고 춤도 못 보고, 자꾸 그걸 읽고 있단 말예요! 음악을 자막으로 배운단 말예요!) 아이돌 그룹들의 현란한 노래와 랩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가사의 내용이 어찌나 ‘아스트랄’ 하고 괴이하고 직설적인지, 자막 읽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노래와 퍼포먼스와 가사의 불일치 때문에 배꼽을 잡는 경우도 많다. 걸그룹들의 노래는 대부분 ‘너는 정말 나쁜 남자다’라거나 (그래서) ‘남자와 곧 헤어질 예정’이거나 (아니다) ‘내가 오히려 나쁜 여자다’라거나 (이럴 바엔) ‘다 싫어, 전부 꺼져버려’(라며 ‘멘붕’의 극단을 보여주는) 가사들이 많은데, 이토록 가사는 슬프고 비트는 살벌하게 빠르고, 춤은 몸살나게 애크러배틱한 이유에는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빠른 음악 속에서 너의 몸을 극도로 피곤하게 만들어 이겨내도록 하여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걸그룹들의 무대가 슬프다.
관심이 깊어지고 있는 걸그룹(이라고 말하기엔 모호하지만 장현군이 입대하는 바람에 이제는 진정한 걸그룹) ‘써니힐’은 ‘아스트랄 걸그룹’의 한 극단에 있다(반대쪽엔 에프엑스?). 써니힐의 가사를 보고 있으면 정신줄을 놓은 멍한 모습의 누군가가 보인다. 3인조였을 때나 <최고의 사랑> O.S.T <두근두근>을 부를 때만 해도 멀쩡한 사람들로 보였는데, EP 《Midnight Circus》에 든 <Let’s Talk About>을 들으면서 이들의 남다른 해괴함을 눈치채고 말았다.
<Let’s Talk About>은 미성과 코타가 작사에 참여한 곡인데, 노래 중에 갑자기 연기를 한다거나 내레이션을 한다거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구어’를 끌어들여 노래를 풍성하게 만드는 솜씨가 놀랍다. 써니힐은 해괴함을 숙성시키더니 결국 다음 앨범에서 <나쁜 남자>라는 불세출의 괴작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이 곡 역시 미성과 코타가 참여했다).
2012년을 사는 한국 사람이라면 <나쁜 남자>를 듣는 순간 자동적으로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가사가 이렇다.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 오빤 말이 많아… 남들의 시선 따윈 눈이 작아 안 보여요 (우리 오빤) 남들의 의견 따윈 귀가 잘 안 들려요 (우리 오빤).’ 물론, 그분을 직접적으로 ‘디스’하려는 목적은 아니었겠지만 (설마, 그랬어?) 듣는 순간 가슴속에서 전해지는 ‘어떤 통쾌함’은 숨길 수가 없다. 2012년의 한국을 이런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거구나.
써니힐이 신곡 <백마는 오고 있는가>를 발표했다. (히트메이커이자 계속 함께 작업하고 있는) 김이나 작사, 이민수 작곡의 노래지만 이젠 뭘 해도 써니힐만의 색깔이 묻어나고 있다. 시원하고 통쾌하다. 써니힐, 이대로 쭈욱,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