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은 했지만 표절은 아니다.” 요즘 사회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태권도 스타 문대성의 말이다. 인용과 표절은 전혀 다른 것이거늘 출처도 명기하지 않고 남의 논문을 몇 십쪽씩 그대로 베낀 사람의 변명치고는 너무 당당하게 들린다. 이보다 더 황당한 것은 문대성이 베낀 그 논문조차도 원문이 아니라 짝퉁이었다는 사실. 한마디로 문대성의 논문은 짝퉁의 짝퉁, 플라톤이 말한 ‘시뮬라크라’(simulacra). 한국사회는 이렇게 포스트모던하다.
두개의 돈키호테
‘포스트모던’의 관점에서 문대성의 말이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 남의 책을 통째로 베끼고도 독창적 저작으로 인정받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보르헤스의 단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생각해보라. 그의 것은 세르반테스의 저작과 문자상으로는 완벽하게 동일하다. 그럼에도 두 저자를 나눠놓는 시대와 장소의 차이(17세기의 스페인과 20세기의 프랑스)가 구두점 하나 다르지 않은 텍스트에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장애에도 불구하고, 메나르의 파편적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의 것보다 미묘하다. 후자는 그의 기사도의 허구에 자기 나라의 메마른 지역적 현실을 대립시킨다. 메나르는 레판토와 로페 데 베가가 살던 시대의 카르멘의 나라를 자신의 ‘현실’로 선택한다. (…) 그의 작품에는 집시 얘기도, 정복자도, 필립 2세나 종교재판의 처형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지역적 색채를 무시하거나 제거한다. 이 무시가 역사소설의 새로운 개념을 지시한다.”
보르헤스의 이 짧은 이야기는 아마도 ‘저자의 죽음’, 나아가 ‘주체의 죽음’이라는 포스트모던의 철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예에서 피에르 메나르의 돈키호테를 세르반테스의 것보다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저자’라기보다는 차라리 ‘독자’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피에르 메나르’의 이야기는 남의 것을 완벽하게 베끼더라도 더할 나위 없이 독창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예는 현실이 아니라 허구에나 존재한다.
기술복제시대의 독창성
10여년 전 독일 유학 초기에 남의 인용문만으로 된 책을 구상한 적이 있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독창적이기 힘들다는 게 이 시대의 불행. 아니나 다를까, 듣자하니 이미 발터 베냐민이 온갖 인용문으로 짜깁기한 책(<아케이드 프로젝트 Passagenwerk>)을 썼다고 한다. 실제로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책을 쓸 때 이 기법을 사용해보았으나, 애초에 구상대로 책을 100% 인용만으로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잘해야 30%나 될까?
100% 짜깁기를 해도 얼마든지 독창적일 수 있다. 외려 그게 고전적 방식으로 독창적인 것보다 더 힘들지도 모른다. 100% 인용으로 독창성에 도달하는 것. 이거야말로 “새로운 것은 요소가 아니라 배치”라는 모더니즘 강령의 극한적 실천이리라. 물론 이 경우 전제되어야 할 것은 인용이 인용임을 분명히 밝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100% 남의 글을 인용했다는 것, 그 사실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 자체가 그 예술적 실험의 생명을 이루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요소가 아니라 배치”라는 모더니즘 강령은 기술복제시대의 어떤 상황의 산물이리라. 자, 글을 쓰고 싶은가? 인터넷을 뒤져보라. 당신이 쓰려는 글, 누가 이미 써놨을 것이다. 사진을 찍고 싶은가? 이미지 검색을 해보라. 이미 누군가 똑같은 사진을 올려놨을 것이다. 이것이 기계복제를 통한 대량생산시대의 피할 수 없는 현상. 이런 시대에도 여전히 ‘독창성’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창작이 아니라 복제의 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앤디 워홀의 작업은 이 모더니즘의 강령보다 한 걸음 더 진화한 전략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광고전단을 만드는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대중 스타들의 얼굴을 복제한 것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는 독창성의 신화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아틀리에를 ‘공장’이라 부르며 공장에서처럼 작품의 제작을 조수들에게 맡겼다. 이렇게 독창성의 자취를 철저히 없앰으로써 그는 역설적으로 최고의 독창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의 독창성은 어디에 있는가? 20세기에 들어와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영역에서 기술복제의 성격, 즉 프로토타이프를 복제하여 스테레오타이프를 찍어내는 대량 생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 와중에서도 예술은 손으로 원본을 제작하는 거의 유일한 수공업의 영역으로 남았다. 다시 말하면 상투형의 바다 속에서 ‘독창성’의 마지막 성채로 남은 셈이다. 앤디 워홀의 독창성은 이 마지막 성체를 파괴하고 예술의 독창성을 새로 정의한 데에 있다.
고전적 독창성을 파괴하고 독창성에 대한 새로운 관념에 도달한다는 전략. 이를 워홀의 이미지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초현실주의자들이 이른바 ‘낯설게 하기’를 통해 일상적(ordinary) 사물을 비범하게(extra-ordinary) 보이게 했다. 이게 모더니즘의 전략이라면, 앤디 워홀은 이와 반대로 일상적 사물을 더욱더 일상적으로(ordinary-ordinary) 만들려 한다. 워홀의 것은 포스트모던의 독창성이라 할 수 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리포트와 관련하여 늘 ‘표절’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아날로그 시절에는 손으로 베끼는 수고라도 해야 하지만 디지털 표절은 ‘잘라 붙이기’의 간단한 조작만을 요구한다. 듣자하니 이를 보다 못한 은사께서 리포트는 자필 원고지로만 받겠다고 하셨단다. 그러자 학생들은 HWP로 문서를 작성하여 이를 ‘원고지 출력’으로 뽑은 뒤, 원고지를 사다가 출력된 그대로 손으로 베껴냈다고 한다.
시대의 흐름을 무시하는 이런 보수적 방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내가 제안한 것은 ‘잘라 붙이기’의 자유를 보장하되 대신 리포트에 모더니즘 수준의 ‘몽타주’를 구현하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것은 요소가 아니라 배치다.” 따라서 배치에서 독창성을 보여달라는 요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요구가 너무나 이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요소의 새로움보다 어려운 게 배치의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몽타주로서 글쓰기
사실 모더니즘의 새로움은 고전주의로부터의 일탈에 있다. 모더니즘의 방식으로 새로우려면 일단 고전주의적 창작에 익숙해야 하며, 그 상투성으로부터 독창적으로 일탈해야 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문제는 아직 고전주의적 작문에조차 익숙하지 않다는 것, 한마디로 상투적 글쓰기로부터 ‘일탈’을 할 처지가 안된다는 것이다. ‘격’이 있어야 ‘파격’도 있는 법. ‘격’이 없는 곳에서 ‘무격’과 ‘파격’을 구별하기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문대성이 논문의 독창성을 주장하는 사이에, 그의 논문이 3편의 다른 논문을 짜깁기한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 따라서 그의 논문의 ‘독창성’ 역시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서 찾아야 한다. 대학가 하위문화, 즉 학부생들의 리포트 제작형식을 과감히 학위 논문의 생산방식으로 채택한 것.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이 발상의 ‘대담함’이다.
‘문도리코’란 별명은 아마도 그의 업적에 대한 모독이리라. 그의 독창성은 아날로그 표절에 만족해왔던 학계의 태만과 나태를 전복하고 마침내 논문 표절의 디지털화를 완성했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