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짧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얇은 책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단편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정확히는 중편과 단편을 편애한다). 우리 집 개가 3일쯤 물고 빨던 갈비뼈처럼 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미끈하고 단단한, 뼈대 말고는 아무것도 들러붙지 않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길고 재미있는 책이 되려면 리듬이 필요하다. 가끔은 예상치 못한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해야 하고, 청룡열차를 타고 지나가며 바라보는 아파트단지의 창문처럼 기억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풍경을 과감히 잊어버리기도 해야 하고, 그러다가 사랑을 만나면 인생을 걸 줄도 알아야 한다. 존 어빙 같은 경우는 ‘이빨’이 대단한 작가에 속하는데, 언제나 약간 필요 이상으로 길다는 느낌이 드는 그의 책은 수없이 지루하고 별볼일 없는 순간이 인물과 서사 사이에 복도처럼 늘어선 구조의 결과물이다. 수많은 대화와 묘사는 그 순간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지만 큰 그림에서는 이야기를 부드럽게 감싸안는 역할을 해야 하고, 문체는 하나의 세계로서의 통일성을 갖추어야 한다. 크게 보면 단편도 그와 같지만 들여다볼수록 차이가 눈에 띈다. 아마 능숙한 살수의 칼놀림이 그럴 것이다. 한칼에 승부는 끝난다. 한번 앉은 자리에서 결정나야 한다. 한순간이라도 독자의 눈을 팔게 했다가는 영영 버림받기 십상이다. 10쪽짜리 소설에 느슨한 구석이 있다면 유죄다. 독자는 모든 문장이 범인인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탐정처럼 읽어야 한다. 당연히 문장과 문장 사이의 긴장도가 높다. 방심하면 맛을 잃는다. “지금 뭐 지나갔어?”
애석하게도, 한국에서는 단편집보다는 장편소설이 더 인기가 높다. 단편집에 대한 서평에 “더 길면 좋겠어요”라고 쓴 독자의 말에 충격받았다는 어떤 작가의 말을 듣고 웃어야 할지 헷갈렸다.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사건은 부연설명을 통해 완전히 해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단편소설은 불친절 그 자체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창조주처럼 숨을 불어넣는 것은 작가보다는 독자다. 그래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 번거롭고 까다로운 독서다. 그게 맛이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나의 끈질긴 단편 애호는 외국어 공부가 취미였던 나의 어린 시절의 습벽에서 비롯한 결과일 뿐일지도 모른다. 고등학생 때부터 외국어 공부를 위해 읽기 시작했던, 오로지 편당 길이가 짧아서 샀던 그 많은 책들. 서머싯 몸과 로알드 달과 레이먼드 카버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와 알퐁스 도데와 트루먼 카포티와 야마다 에이미. 마침내 모국어로 경험한 황석영과 이청준과 오정희라는 화룡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