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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원] “상영관, 문화적 소통 공간, 사회적 발언의 거점되어주길”
이영진 사진 최성열 2012-04-13

민간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여는 김동원 감독

3월22일, 인디다큐페스티발 개막식 뒤풀이. 김동원 감독은 어느 때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그는 민간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개관 소식을 안주 삼아 후배 감독들에게 연거푸 술잔을 건넸다. 광화문 미로스페이스와 임대 계약만 남겨두고 있다는 그의 말을 듣고 ‘이번에는 정말?’이라고 속으로 되물은 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인디스페이스는 영화계 안팎의 후원자들을 모아 극장 물색에 나섰지만, 계약 성사 직전에 무산되는 우여곡절을 여러 차례 겪었고, 이 때문에 개관 시기 또한 애초 예정보다 5개월 가까이 늦춰졌다. 인디스페이스의 부활이 연기되면서 가장 애가 탔던 이는 다름 아닌 민간독립영화전용관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동원 감독이었을 것이다. 그가 대낮부터 “커피 마실 거면 소주 마시자”고 선술집으로 끌고 간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임플란트 치료를 받느라 쑥 빠진 아랫니 사이로 극장 문을 열기 전의 설렘과 여전히 남아 있는 부담이 들숨과 날숨처럼 수시로 교차했다.

-3월27일 임대 계약을 마쳤다. 한시름 놓았을 텐데. =이제 개관 준비를 해야지, 뭐. (웃음) 개관을 5월 말로 잡았는데, 시간이 촉박하다.

-인디다큐페스티발 개막식 때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였다. =그날 극적으로 타결이 됐으니까. 구두 약속이지만. 너무 좋아서 뒤풀이에서 춤추고 그랬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일이 꼬이는 바람에.

-이번에도 또? 세부적인 계약 조건 때문이었나. =자세히 밝히긴 좀 그렇고. 서로에 대한 오해가 좀 있었다. 어쨌거나 엎어지기 직전까지 갔다. 앞서 CJ CGV쪽에서 물리칠 수 없는 임대 조건을 제시한 터라 (미로스페이스와) 계약이 성사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많이 지쳤을 텐데. =짜증도 많이 냈다. 더이상 못하겠다고, 알아서들 하라고. (웃음) 후원자들을 볼 면목도 없고. 우리 입장에서는 미로스페이스가 마지막 선택지였다. 여기 안되면 CJ CGV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건 아니잖나. CJ CGV쪽에서 너무 좋은 조건을 제시하니까 내부에서도 그쪽으로 들어가자는 의견이 만만찮았다. 미로스페이스와 잘 안되면 내가 2선으로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했다. =쉬운 길로 가면 의자 사준 후원자들에게 할 말이 없게 된다. 그렇게 할 거면 돈 왜 걷었냐, 그럴 테니까. 한국독립영화협회 전체가 욕먹을 수도 있고. 극장 운영을 책임질 친구들을 떠올리면 너무 모질게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마치 영혼을 파는 것 같았다니까.

-대기업과 선을 그은 이유는 뭔가. =대기업의 지원은 부분적이고 한시적이다. 사장이 바뀌어서 그만 나가달라고 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건가. 독립영화전용관의 설립 주체는 개인일 수도 있고, 기업일 수도 있고, 영화진흥위원회의 인디플러스처럼 정부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이 망하고, 정권이 바뀌고, 자본의 이해관계가 달라져도, 영향을 받지 않는 상영공간이 최소한 한곳은 있어야 한다고 봤다.

-최근 추진위는 민간독립영화전용관 확대를 위한 시민모임으로 확대 개편됐다. =하나만 만드는 게 아니라 계속 만들어갈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웃음) 뉴욕은 독립영화를 볼 수 있는 상영관이 10곳이 넘는다. 추가적으로 스크린을 확보하는 과정에서는 대기업이 이번처럼 좋은 조건을 내놓으면 같이할 계획이다.

-2년 전, 미로스페이스 앞에서 많은 독립영화감독들이 “나는 우리 영화가 도둑질한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1인시위를 벌였다. 당시 미로스페이스는 영진위 공모에서 특혜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시네마루에 극장을 임대해준 상태였다. 어찌 보면 빼앗긴 고지를 탈환한 모양새다. =지난해 들어가기로 했던 신촌의 아트레온보다 좌석 수도 적고, 접근성도 더 좋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는 더 크다. 인디스페이스가 한때 광화문 시절의 미디액트 같은 역할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단지 상영관이 아니라 문화적 소통 공간으로서, 사회적 발언의 거점 같은 기능을 해줬으면 한다.

-앞으로 운영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도 적지 않은 후원이 필요할 것이다. =대략 계산을 해보니까 월 500만원 이상의 후원금을 모아야 한다. 인건비까지 포함하면 월 2천만원 이상이 필요한데, 상영관 대관만으로는 절반도 못 채운다. 게다가 올해는 접수 기간이 지나서 영진위 지원도 받을 수 없다. 좌석 기부를 받아서 극장을 마련할 수 있었지만, 운영을 위해서는 CMS(‘주춧돌 회원제’)를 더 활성화해야 한다. 특히 올해는.

-인디스페이스가 처음 명동에 들어섰던 2007년과 비교하면 어떤가. =그때는 과연 1년 동안 프로그램을 채울 수 있을까 걱정했지. 큰소리를 빵빵 치긴 했는데 상영작 못 채워서 헉헉거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지. 다행히도 2008년부터 장편독립영화 편수가 크게 늘었다. 이를 인디스페이스의 존재 때문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상영공간이 확보되면서 창작욕을 일정 부분 자극했던 것 같다.

-인디스페이스가 문을 닫은 지난 2년 동안 독립영화인들은 집 없는 설움을 절감했을 것이다. =처음엔 오기가 동력이었다. 뺏겼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나. 분한 마음이야 이제 많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독립영화를 걸려면 여기저기 눈치를 봐야 하니까. 현실적인 피로감이 전용관을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로 이어졌던 것 같다.

-강한섭-조희문 시절의 영진위에 대한 분노는 정말 다 사그라들었나. =그때는 정말 자다가도 벌떡…. (웃음) 문정현 감독의 <할매꽃>이 개봉지원 심사에서 떨어진 적 있다. 푸른영상이 영리단체여서 떨어뜨렸다고 하더라. 그래서 강한섭한테 갔지. “야, 푸른영상이 영리단체냐” 그랬더니 자기는 비영리단체인지 알고 있지만 문화체육관광부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면서, 월말까지 답변을 주겠다고 하더라. 이게 말이 되나. “너,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고 나왔는데, 황당하고 서글프더라. 그런 상황에서 독립영화전용관이랑 영상미디어센터 사태가 터지니까.

-이곳에서 영화제 개막식까지 치르긴 어려울 텐데. =욕심 같아선 스크린이 2개는 되어야 하는데. 일단 개막식은 근처 서울역사박물관이나 금호아트홀을 활용할 계획이다. 대관료를 따로 내는 건 아닌데 무료상영을 해야 해서 영화제들과 일정한 협의가 필요하다.

-<상계동 올림픽, 그 후>는 2008년에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벌써 4년이 흘렀다. 아직 촬영 중이다. =예전처럼 카메라 한대 달랑 들고 가서 찍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일단 상계동 주민들을 만나려면 부천, 의정부 등으로 나가야 하니까 시간표를 정말 촘촘히 짜야 한다. 게다가 이제는 뷰파인더를 제대로 못 본다. 눈이 나빠져서 초점이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를 모르는 거지. 한번은 촬영을 다녀왔는데 핀이 다 나가 있더라. 고정적으로 스탭을 둘 수도 없는 상황이고, 도와줄 친구가 있을 때만 듬성듬성 촬영을 한다.

-지난해 말에 진척이 잘되지 않는다며, 진짜 고민을 사석에서 털어놓은 적 있는데. =그것까지 다 이야기해버리면, 음. (잠시 침묵) 간단히 말하면, 세상도 변했고, 나도 변했고, 또 상계동 주민들도 변해서지. 지난 20여년 동 안 자본이 한국사회는 물론이고 기본적인 인간관계까지 잠식하고 압도해왔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자본 아래로 기어들어간 거지. 중요한 건 내가 이런 현실을 반추하고 성찰할 만한 자격이 있는가, 과연 그런 내가 희망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는가다. 지금은 차라리 모르면 모르는 대로 질문을 던져보자는 쪽으로 선회를 하는 중이다.

-한때 공동체를 꿈꿨던 사람들의 달라진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2009년에 <상계동 올림픽> 때 내레이션을 맡아줬던 손인숙 수녀님이 로마에서 돌아오셔서 다들 용산에서 모입시다, 그랬는데 여섯분밖에 안 오셨다. 뭐 그것 때문에 실망한 건 아닌데, 모여도 다른 이야기들만 나누는 거지. 누구는 장가갔다, 뭐 이런 이야기만. 느낌이 없는 건지, 애써 꺼내지 않으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만나서 반갑다 정도의 분위기밖에 안 나오더라.

-<끝나지 않은 전쟁>(2008) 이후 캄보디아의 아동 성매매 현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Total Brokeness>라고, 캄보디아에 거주하는 노르웨이 활동가의 제안을 받아서 촬영했다. 캄보디아의 아동 성매매는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다. 크메르루주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천박한 자본주의가 밀려들면서 사람들의 가치관, 특히 성적 윤리 같은 것이 빠르게 붕괴했다.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 정신적 공황상태에 놓이면서 어찌할 줄 모른다. 인신매매와 강간 역시 그래서 발생하는 것이고. 난 촬영만 하고 편집은 실은 아까 말한 활동가가 다 했는데, 제작사가 바뀌면서 촬영 테이프가 유실되는 등의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왜 그 장면이 없냐고 물었더니 테이프 일부를 이전 제작사에 뺏겼다고 하더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것도 5년이 넘었다. 평소에는 학생들에게 격의없이 대하지만 작품을 놓고서는 깐깐하고 꼬장꼬장한 선생님으로 돌변할 텐데. =학생들 많이 울렸다. (웃음) 1주일에 한번씩 면담을 하는데 그 자리가 심리상담에 가깝다. 이 작품을 왜 만들게 됐는지를 물어보다보면 학생들이 남에게 털어놓지 못한 개인사를 털어놓는 경우가 많다. 다큐멘터리는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면 찍을 수 없다. 그렇다면 학생들이 떨치고 일어설 수 있게끔 해줘야 하는데, 내가 과연 뭘 해줄 수 있을까 하는 무력감에 사로잡힌다. 다행히 강사로 나서준 (류)미례나 경순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내가 대수롭게 넘기는 것들을 두 사람은 잘 집어낸다.

-감독 김동원, 교수 김동원, 투사 김동원, 인간 김동원에 스스로 순위를 매긴다면. =웃기는 질문인데. 뭐 감독, 교수, 투사, 인간 뭐 이런 순 아닐까. 아빠 김동원은 그 아래고. 아, 남편 김동원이 꼴등이네. 월급 주는 게 아니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셈인데. 그런 나를 보면 한심하지.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봤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았던 게 뭐였나. =<투 올드 힙합 키드>가 제일 재밌더라. <버스를 타라> <나의 교실> <장 보러 가는 길> <아무도 꾸지 않은 꿈> 등도 좋았다. 난 작품 그 자체를 평가하기보다 그 작품이 나한테 힘을 주느냐 안 주느냐로 따지는 편인데, 특히 <버스를 타라>는 뜨겁게 건드리더라.

-앞으로 ‘찍어야’ 할 작품이 뭔가. =잘 모르는 건 안 건드리는 편이다. 일단은 행당동, 봉천동 사람들에 관한 후속편 작업을 해야 한다. 산동네, 철거촌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벅차게 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어!” 하는 느낌을 받는 거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전범 같은 인물들을 찍고 싶다. 이를테면 정일우 신부님이나 봉천동 김희영 총무님 같은 분들. 그런 사람들 곁에서 어떻게 내가 배신할 수 있겠나. 그런 좋은 사람들 때문에 내가 카메라를 들고 관객에게 “좀더 버티십시오. 좋은 세상이 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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