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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진의 귀를 기울이면] 낭패한 서사에 마음은 흔들리고

<건축학개론>

은희경은 <빈처>의 끝에 “이루지 못한 사랑에는 화려한 비탄이라도 있지만 이루어진 사랑은 이렇게 남루한 일상을 남길 뿐인가”라고 썼다. 우리의 ‘납뜩이’는 “첫사랑이 원래 잘 안되라고 첫사랑이지 그게 잘되면 첫사랑이니, 마지막 사랑이지”라고도 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건축학개론>으로 울었나보다. 까마득히 잊혔던 마음이 낭패한 서사, ‘그때의 그때’에 기어이 도달하자마자 새삼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란 카피가 비극적 낭만과 향수를 더블 샷으로 끼얹었으니까.

아니다. 여기에 홀리면 곤란하다. <건축학개론>은 남자들의 진부한 첫사랑 판타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삶에 대한 얘기다. 다소 안일한 캐릭터와 관습적 묘사가 이걸 헷갈리게 하지만 분명히 과거는 과거로, 기억이 새겨진 담장을 껴안아 내벽으로 세우자고 말한다. 실패가 오로지 실패로 남을 때에야 우리는 사소하나마 뭔가 배우고 요만큼이라도 자랄 것이다. 그런데 극장을 나서는 길이 아득하다. 마음은 흔들린다. 제자리로 돌아온 CD플레이어는 낭패한 서사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는데, 거기 담긴 노래는 영화 밖까지 쫓아와 기어코 발목을 잡는다. 아쉬웠을지라도 <기억의 습작>은 15년 전 옥상에 그냥 남겨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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