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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과거와 현재가 서로를 끌어당기네

<건축학개론>의 시간성 탐구

수리를 중단한 채 파손된 상태로 방치된 폐가의 문에서 시작하여, 말끔히 상처를 보수한 통유리 창의 바깥으로 카메라가 빠져나오면서 끝이 나는 영화 <건축학개론>은 건축적으로 구축된 플롯 디자인으로 시선을 끈다. 알려진 것처럼 인물의 관계와 건축물의 축조 과정이 절묘하게 조응하고 있다는 설정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냉소나 격랑 따위의 정서들이 건물 구조를 바꾸어버리는 건축의 감각화도 그리 두드러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도리어 건축학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건축가가 끌어가는 이야기라거나, 집을 설계하고 만드는 과정을 작중 인물의 심리 변화와 연동한다는 표면의 층위를 넘어서는 곳에 있다. 두 주인공의 심리적 정황을 은닉, 심지어 기만하고 점진적으로 내면의 진상을 드러내는 서술 방식이 그러하거니와 시간의 조립과 배열, 교차하는 기억의 국면들을 ‘공간의 시간화’라 부를 수 있는 공감각적 개념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 ‘건축’을 끌어들인 이유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개포동에서 온 여인

한편의 영화가 그 자체로 견고한 건축물에 비견될 만한 무엇이라는 것은 영화사(史)의 여러 감독들과 논자들에 의해 이미 입증된 바, 구태여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건축학개론>에서 이는 스토리를 풀어가는 플롯이라는 설계 도면과 시간 교차라는 골조, 그 위에 살을 붙여가며 형체를 드러내는 숨은 이야기 따위의 표면 자재들이 건축물의 형상으로 떠오르면서 구성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건축학개론>의 기본 설계 도면은 현재와 과거의 교차구성을 통한 봉인된 기억의 탐문이다. 승민(이제훈)과 서연(수지)이 함께 살았던 옛 동네 정릉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한 ‘개포동’, 이름조차 생소했던 이 개포동의 거주자가 된 장성한 서연(한가인)의 방문으로 영화는 열린다. 뜻하는 대로 삶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개포동에서 온 이 여인이 끌고 들어와 소환하는 것은 개포동이나 제주도 같은 시원성을 환기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시간’이다. 하여 ‘공간의 시간화’라는 것으로 개념화되어야 할, 먼 곳에서 온 여인이 멀리 있는 시간을 호출하는 공감각적 정동(情動)은 <건축학개론>의 건축적 플롯을 지탱하는 주춧돌일 것이다.

15년의 간격을 납작하게 붙여버리는 <건축학개론>의 시간 압축에 있어 독창적인 대목은 물리적 시간의 위계를 설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건축학개론>의 과거는 통념적인 회상 시제가 아니다. 대학 초년생 시절 풋사랑을 나누었던 남녀가 15년이 지나 재회하면서 분기하는 과거와 현재는 물리적인 시간의 전후관계로 탐구되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평행축 위에 유사성을 가지고 연결되는 특정 지점들을 이어가는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과거와 현재로 나뉘어진 채 주어지는 두개의 스토리는 흡사 양자적 선택에 의해 성립되는 한쌍의 병행우주를 동시에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건축학개론>은 하나의 현실과 그로부터 불려나오는 과거가 아니라, 온전히 두개의 현실적 우주에 관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미 성인이 된 승민과 서연, 과거의 그들을 한 배우가 연기하지 않고 굳이 더블 캐스팅한 연출의 의도에 명시적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는 마치 동일한 시간대에 비슷한 경로를 걷는 두 커플의 스토리를 보는 것처럼 포개지면서, 그 추이에서 유사한 국면들을 지나고 있다. 하나의 기로에서 갈라진 두 이야기 모두 결국 승민과 서연이 만나고, 서로를 탐문하면서 상대의 히스토리를 주섬주섬 알게 되고, 최종 지점에서 헤어진다. 2개의 트랙에 바퀴를 걸치고 전진하는 기차처럼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트랙은 어느 한 트랙이 나머지를 결정하고 복속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가 독립적으로 존재, 병렬되면서 느슨하게만 간섭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현재가 과거에 말을 걸거나 과거가 현재의 근거 자료로 불려나오는 방식을 취하기보다는 상호간 틈입하는 플로팅 장치들의 화성구조를 설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러티브를 관장하는 시선 주체는 과거는 승민, 현재는 서연이며 둘의 관계에서도 과거는 서연, 현재는 승민이 주도권을 쥐고, 과거에는 서연에게 현재에는 승민에게 각각 신분적 우위를 점한 상상적 연인(강남 선배 재욱과 부유층 여식 은채)이 존재한다. 2개의 트랙이 재회(만남)→ 관계의 진전 → 헤어짐의 궤적으로 맞물리면서, 표층적으로는 현재가 과거의 재판(再版)이 되지만, 심층적으로는 과거를 극복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이처럼 개포동에서 온 여인의 방문으로 인해 현재는 과거를 복기하며 교정하는 층위에 놓이고, 과거 역시 현재를 규정하는 정보판 또는 선체험으로만이 아니라 거듭 재진술되고 재발견되어야 하는 시간의 좌표로 설정된다.

기억의 습작 혹은 위작(僞作)

재진술과 재발견은 <건축학개론>에서 이용주 감독이 은근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숨은 테마가 아닐까 한다. 과거의 말과 행위, 사물들은 현재에서 반복되고 재발견된다. 이로부터 서사의 설계와 그것을 끌고 가는 형식의 전략도 결정되었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재발견의 대상은 ‘집’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 영화는 우연히 발견한 폐가를 단장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과거와 현재에서 모두 그들은 폐가가 된 집(정릉의 빈집과 제주도의 망가진 집)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집을 건축한다. 집은 기능적 의미를 초월하여 시간의 흔적들이 내려앉은 심상의 풍경쯤으로 형상화된다. 그러니까 두개의 집, 과거 정릉에서 드나들던 폐가, 현재 제주도에 증축하고자 하는 서연의 옛집은 비어 있는 부재의 공간인 동시에 어떤 가능태로 설정되었다. 감정을 쌓아올리고 관계를 진전시키는 이 건축 작업을 주도하는 인물은 서연이고, 홀린 듯 그녀를 뒤따르는 것은 승민이다.

시간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건축학개론>의 특장은 그것이 ‘플래시백이 없는 회상영화’라는 것이다.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의 이행을 신호하는 명백한 전환은 최초 과거로 전환되는 카페 신, 승민이 서연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오는 웨딩드레스숍 신뿐이다. 시간 여행의 처음과 끝을 묶어줌으로써 회상 시제를 표시하고 있지만 서사의 몸통은 시간을 분리한 채로 제시한다. 따라서 왁자하고 파릇파릇했던 설렘으로 출발한 과거의 스토리는 추억이나 그리움의 표상이 아니라 쓰라린 파국의 순간으로 종결된다. 이와 달리 현재는 상대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물론 승민의 상실된 기억은 트릭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으로 보인다) 국면에서 출발하여 이별했던 시간의 직후까지 거슬러감으로써 물리적인 시간성을 초월한다. 현재 시제의 끄트머리에서 승민(엄태웅)과 서연의 심리 상태는, 과거 첫눈이 내리는 날 빈집에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 시간 직후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과거가 현재로, 현재는 과거로 흘러 둘의 접점이 형성된다는 사실은, 플롯의 배열상으로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마지막 쌍이 <기억의 습작>을 건네주고(과거) 되돌려받게 되는(현재) 것으로 이어지고 있는 플롯의 배열을 고려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종국에는 과거의 끝과 현재의 끝이 <기억의 습작>으로 표상되는 매개에 의해 연결되면서 틈새를 봉합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현재와 과거가 어느 한 국면을 준거점으로 삼아 교통하는 일반적인 회상구조가 아니라 상호 틈입, 병치되는 양태로 전개되는 이유는 특정 시점까지 인물의 기억이 감추어지거나 종종 위조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논리 속에서 중요한 것은 기억을 만드는 근본적인 힘의 소재처이다. 여기서 시간의 더께를 쓰고 감추어진 위조된 기억들, 그리고 얼버무리기가 작동한다. 한 차례의 습작을 거친 뒤 그들은 기억을 위조한다. 승민과 서연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속이고 기만한다. 승민은 15년 만에 건축 사무실에 불쑥 찾아온 서연을 기억하지 못하는 투인데, 이것은 자기기만이다. 서연 역시 기품이 넘치는 강남의 사모님으로 불운한 자신의 처지를 위장한다. 정보의 제시도 늑장을 부리는데, 이와 같은 두 인물의 처세로부터 무엇이 그들을 감추고 속이게 만들었는가를 탐문하는 과정이 서사의 핵심에 놓인다. 위조된 기억과 기만적인 위장을 조금씩 벗겨가면서 감춰진 이야기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것은 플래시백에 의한 회상이 아니라 평행 제시되는 현재와 과거의 이중구조 안에서 반복되는 말과 행위, 상황의 조응을 통해서이다.

기억을 현재화하기

위조된 기억의 봉인이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건축학개론>의 창의의 바탕이 드러나는 바, 그것은 기억을 현재화하는 방식에서 찾아진다. 과거는 과거가 아니고 현재와 병렬되며 나란히 흘러가는 또 다른 삶으로 개념화된다. 이 영화의 시간성은 순서의 개념을 잃어버린 기하학 공간처럼 묘사된다. 이를 매개하는 장치가 승민과 서연의 과거와 현재까지를 하나로 통합하 는 건축학개론 수업이다. 에피소드간의 연결을 매개하는 장처럼 제시되는 이 수업은 15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이 대목에서 건축학개론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김의성)는 출연 분량을 훌쩍 상회하는 임무를 떠맡는다. 그가 학생들에게 요구하는 평범치 않은 과제는 평행하게 달리는 과거와 현재의 진행을 암시하고, 해설하는 열쇳말이고, 물리적 시간의 흐름을 일순간에 섞는 일종의 주술이다. 흡사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영매라고 해도 좋을 그의 역할은 스토리의 국면을 주관하는 내레이터, 우물 속 같은 과거와 현재의 그들에게 주문을 거는 초시간적인 기억의 주술사이다. 이 주술사의 주문(건축학개론 수업의 과제들)은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를 한데 엮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주문이 수업을 들었던 과거의 저들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현재의 승민과 서연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서사의 끄트머리에서 비로소 개론이 끝나고 본론 또는 심화학습에 들어갔다고 할까? 그렇다면,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교수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첫째, 자기가 사는 동네를 잘 관찰하고 알아보라는 것이요, 둘째는 가장 먼 곳까지 가보라, 셋째는 날씨도 좋은데 어디 가서 놀다오라는 부추김이다. 앎과 발견, 먼 곳으로 가보기, 그리고 함께하는 여행. 과거는 그렇다치고 교수의 이 선문답 과제는 현재의 스토리와 어떻게 결부되는가? 15년 만에 만난 승민과 서연은 교수의 주문에 따라 위조된 기억을 앞세운 탐색전을 벌이고, 먼 곳(제주도)으로 가보고, 몇 차례 설계를 변경하다가 제주도에 함께 머물면서 과거에 모형으로만 존재했던 이층집을 올린다. 전술했듯이 초조하고 뒤숭숭했던 시절의 기억들로부터 재진술, 재발견되는 것들은 <건축학개론>의 숨은 주제이다. 미묘하게 숨겨진 이 주제 때문에 서사는 단조로운 회상 시제에 갇히지 않는다. 과거만 현재에서 재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과거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썅년”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것은 현재인데, 그 말은 과 거의 한 지점,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재등장(납뜩이의 입을 통해)함으로써 환기된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다른 상황에서 같은 말이 튀어나올 때 기억은 소멸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같은 층위에 놓여 있는 것임을 지속적으로 신호한다.

기억은 먼 곳에서 와 먼 곳으로 데려가고 재빠르게 시간의 유속을 증가시킨다. 이와 같은 용례는 은근히 숨겨진 채 곳곳에서 불쑥 튀어나온다. “밥 사주세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후배에게 강남 선배 재욱이 던지는 “엄마가 밥 안 해주냐”는 말은, 현재로 넘어와 제주도에서 승민의 입을 통해 서연에게 비슷한 뉘앙스로 말해진다. 한갓진 버스 정류장에서 몰래한 첫 키스의 순간, 서연이 잠이 든 것처럼 자신을 위장했던 기억은 제주도 집 2층 마당에서 잠이 든 승민을 서연이 어루만지는 순간 스르르 살아난다. 과거의 서연이 폐가를 정돈하면서 심었던 꽃은, 제주도의 집이 완성된 뒤 두 사람이 정원에 심는 작은 나무로 부활한다. 네거필름이 현상이 되어 형체를 얻는 것처럼, 달리 말해서 잃어버렸던 기념품을 우연히 발견하는 것처럼, 버려졌던 말과 행위들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정릉 빈집의 죽은 시계를 살려주는 서연의 행위처럼 죽었던 것들이 생명을 얻으면서 15년의 시간은 압축 프레스로 누른 듯 납작하게 붙는다. 죽은 말들과 사물의 생환은, 기억을 시공하는 <건축학개론>의 서사는 물론이고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진실이 조금씩 늘어나는 플롯 구조와도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 기억의 구조화와 완성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집을 ‘성립’시킨다. 서연이 그린 그림이 모형이 되었다가 제주도의 이층집으로 완성되는, 그림→ 모형→ 건물로 진화하는 집의 서사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진화의 경로를 지탱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지지(地支), 보충하며 쌓아올리는 건축 작업의 진행을 기억의 구조화 방식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건축학개론>은 생멸(生滅)하는 기억이라는 테제를 하나의 스토리 이면에 숨겨진 것들을 재발견하는 시간의 미세분할 드라마 안에 융해한다. 물론 이용주가 그려 보여주는 이와 같은 시간성의 탐구라는 의제가 자체로 특별하달 것은 없다. 시간성은 시간 매체로서 영화가 지닌 유서 깊은 속성의 하나일뿐더러 여러 영화들에서 이미 다채롭게 구사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 끼친 <8월의 크리스마스>의 영향력을 어렵지 않게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용주의 시간 탐구가 지니고 있는 독특성은 시간의 층위들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견인과 흡착이 표나지 않게 제시된다는 점에 있다. 사소한 디테일들이지만 나는 이것이 <건축학개론>의 건축적 디자인을 지탱하는 강건한 골조와 자재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모든 위대한 건축물은 그 미세한 부분까지 계산되고 확립되어 전체의 구조가 힘을 얻고 풍성해진다. 아주 작은 부분의 변형이 전체적인 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치도록 치밀하게 설계된 이 이야기가 그와 같은 단단한 건축물이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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