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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배] “대중적인 스펙에도 영화화할 수 없는 현실에 화가 났다”
이영진 사진 백종헌 2012-04-06

<26년> 다시 제작하는 청어람 최용배 대표

“제가 지금 웃을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카메라 앞에 선 지 10초도 되지 않아 청어람 최용배 대표가 손사래를 친다. 포즈를 취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불편하단다. 2000년대 중반 청어람은 주목할 만한 투자배급사였다. 당시 그는 메이저 투자배급사와 손잡지 않고 홀로서기에 성공한 몇 안되는 인물이었다. 청어람은 자체 제작 작품만 연간 3편 이상씩 내놓았고, 최 대표는 13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괴물>(2006)로 한국영화 흥행 톱을 거머쥐며 제작자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도 모두 가졌다. 그랬던 그가 2008년 이후 대중 앞에 나서지 않았다. 강풀 원작의 <26년> 제작이 중단된 뒤였다. 외압으로 투자가 무산됐다는 풍문이 돌았지만, 그는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26년>을 되살리고 싶었고, 최 대표의 안간힘은 이후 4년 동안 계속됐다. 인터뷰는 관객으로부터 소액 후원(www.goodfunding.net, www.popfunding.com)을 받아 <26년>의 제작비 일부를 마련하겠다는 내용의 기자회견 직후에 이뤄졌다. 질문의 정확한 의미를 캐묻고 또 신중하게 답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난 시간 그가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이 조금이나마 느껴졌다.

-첫 질문은 당연히 이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2008년 촬영을 열흘 앞두고, 프로젝트가 멈춰선 정황을 알려달라. =그해 늦여름에 촬영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전에 네곳의 투자사들로부터 40억원의 제작비를 약정받았다. 전체 제작비 60억원의 70%에 해당하는 금액을 확보한 상태였고, 촬영에 들어가도 무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두곳으로부터는 20억원을 미리 지급받기도 했다. 그런데 투자 의향을 밝혔던 회사 한곳에서 갑자기 못하겠다고 전해왔다. 투심(투자 심사)이 있었던 날 저녁에 1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던 벤처캐피털 대표가 찾아와 정말로 미안하게 됐다고 하더라. 투심이 있던 날 오전까지만 해도 내부적으로 약간의 반대가 있었지만 잘 마무리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투자사 대표 말이, 함께 펀드를 만든 파트너 회사의 임원이 찾아와서 <26년> 투자에 강하게 반대했다고 하더라. 이후 1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던 또 한곳의 투자사 역시 의사를 철회했다.

-투심을 거쳐야만 투자가 결정되는 것 아닌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벤처캐피털의) 투심은 형식적인 절차다. 투심이 진행되기 전에 실무적인 검토는 물론이고 세부적인 계약 조건에 대한 논의가 끝난다.

-<26년>에 대한 투자를 반대했던 회사는 KT가 맞나. =음… 맞다. 대개 투심에는 과장급이 참여하는데 그날은 상무가 직접 왔다고 들었다.

-KT와 함께 출자해서 펀드를 조성한 벤처캐피털은 어디였나. =소프트뱅크코리아다. 약간의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투자하겠다고 나선 분들이라 별로 감정이 없다. 계약을 하지도 않은 상태라 더이상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기자회견에서 외압을 바람에 비유하면서, 느껴지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했다. =그 이상은 할 이야기가 없다. 외압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더이상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런 일이 알려진 뒤에도 기자들이 두 회사를 찾아가 취재를 안 하잖나.

-청어람쪽에서도 당시 상황을 충분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기자들 중에 입을 열어라, 울어라, 그럼 짖어줄게, 이런 농담을 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울었다가는 추가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마저 사라지는 것 아닌가. 프로젝트가 중단되면서 영화가 엎어졌다고 했지만, 여전히 내 입장에서 <26년>은 계속 진행형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울었다면, 그랬다면 지지와 도움을 받아 <26년>이 살아날 수 있었을까.

-새로운 투자자를 물색하면서 대기업 문도 두드렸을 텐데. 어떤 반응이었나. =<괴물>을 제외하면, 청어람은 그동안 대기업의 메인 투자를 받지 않았다. <26년>도 우리쪽에서 약 20억원을 부담하고 부분투자자를 모으는 식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제3투자사, 제4투자사가 빠져나갔고, 결국엔 대기업에 배급권을 넘기는 식으로 일부 투자를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모두 냉담하더라. 그런 분위기는 이후로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청어람은 캐스팅 계약금 등으로 15억원을 썼다. 빚을 져서라도 더 밀어붙일 생각은 안 해봤나. =투자하고 싶어 하는 곳이 많았기 때문에 무리해서 자기 자본을 투여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5억원 정도 쓰고 물러섰을지도 모른다. 그 상태에서 더 밀고 가는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가능성의 문제였다. 2008년 이후 영화계 안팎이 급속하게 변했는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세상이 빠르게 변할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기민하게, 효과적으로 대응했겠지.

-기어코 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이유가 궁금하다. =2012년이 지나기 전에 어떻게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흘려보내면 억울해서 못 견딜 것 같다.

-어떤 종류의 억울함인가. =강풀 작가의 <26년>은 5·18 항쟁을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다룬다. 액션복수극이라는 대중적인 장르로 풀어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영화화하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우리 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것들을 풀기 위해 고통받은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부끄러운 현실을 되묻고 싶어서였다. 이건 상식과 양심의 문제다. 또 하나는 원작을 접했던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데도 영화를 만들 수 없는 현실에 너무 화가 났다. 대중적인 스펙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크라우드 혹은 소셜 펀딩은 어떻게 떠올렸나. =2008년에 제작이 중단된 뒤에 아고라 청원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기존 투자 방식으로 가능하다고 봤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그래서 관객에게 먼저 제안하는 거다. 정말 이 영화를 보고 싶다면 같이 한번 만들어봅시다, 라고.

-크라우드 펀딩 방식은 그동안 독립다큐멘터리 제작에 주로 활용됐다. =규모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크게 다른 건 없다. 독립영화들의 경우, 자본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하는 작품도 있지만 자본으로부터 배제된 영화들도 있다. 후자의 경우라면, 같은 맥락이다.

-형태는 과거 네티즌 펀드와 유사한 듯 보이지만, 투자보다는 기부에 가깝다. =수익이 났을 경우에 분배하는 투자 형식이 가능한지 따져봤는데 특별한 라이선스를 부여받아야만 가능하다고 하더라. 그래서 후원받는 방식을 택했다. 아름다운 재단의 개미스폰서는 모금액이 1천만원이 한도인데 이미 마감됐다. 굿펀딩, 팝펀딩의 경우, 3월27일까지 이틀동안 1억3천만원 정도가 모인 것으로 알고 있다.

-목표 후원 금액이 10억원이라고 들었다. 크라우드 펀딩 방식은 큰 규모의 자본을 확보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금액이 얼마인지는 둘째 문제다. 이 영화를 꼭 보겠다는 관객의 의지와 열정이 있다면, 얼마나 큰지 한번 모아보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10억원이 모이면 마중물의 역할을 할 것 같다. 투자자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거다.

-감독과 배우, 모두 미정이다. 세팅이 미리 됐다면 후원이 더 쉬웠을 텐데. =책임감 때문이다. 스탭과 배우들을 꾸려놓은 상태에서 4년 전처럼 차질이 생기면 안되잖나. 그들을 볼모로 삼고 싶지는 않다. 크라우드 펀딩 자체가 원점이니까 가능했던 아이디어다.

-재능기부 형태의 제안도 들어오나. =돈 안 받고 특별출연하겠다는 배우가 있다. 어제도 한 CG회사와 동시녹음 스탭이 연락해 재능기부하겠다고 하더라.

-수익이 발생할 경우, 어떤 방식으로 쓸 생각인가. =기부해서 발생한 수익은 기부를 하는 게 맞다. <26년>처럼 지지와 후원이 필요한 콘텐츠에 도움을 주고 싶다.

-누구보다 강풀 작가에 대한 고마움이 클 텐데. =판권 계약 기간이 대개 5년이다. 2006년에 계약했으니까 지난해에 계약이 종료됐다. 그런데 판권 회수를 안 한 상태다. 따로 계약을 체결한 것도 아닌데도. 오늘 기자회견 자리에도 어려운 걸음을 해줬다. 와서 <26년> 다시 시작합니다, 꼭 할 겁니다, 함께 갑시다, 라고 응원도 해줬고.

-시나리오에도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 =원작이 있으니까 기조는 바뀐 것이 없다. 다만 시간이 더 지났으니 설정을 조금 변화한 정도다. 쫄아서 상업적인 부분을 더 강화한다거나 그런 것은 없다. (웃음)

-<괴물2>는 얼마나 진행됐나. =박명천 감독이 작가와 함께 시나리오 작업 중인데 올해 상반기까지는 완고를 내놓을 계획이다. 1편보다 더 나은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부담 때문에 속도가 좀 더디다. <괴물2>는 1편처럼 사회 부조리를 담고 있지만, 본격 괴수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좀더 크다. 테스트 촬영 결과도 만족스럽다. 후원 홈페이지에 가면 테스트 촬영한 동영상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괴물2> 이야기로 넘어가니 얼굴이 좀 밝아졌다. =이 대목에선 좀 웃어도 될 것 같다. <괴물2>는 3D영화로 제작하는데, 공간과 피사체 그리고 스토리 등 모든 면에서 3D영화에 최적이다.

-<26년>과 <괴물2>에 매달리다 보니 시나리오를 들고 오는 신진 감독과 작가들이 없을 것 같다. =아니다. 많이 온다. 안 온다면, 그 이유는 큰 프로젝트를 들고 있어서라기보다 청어람이 CJ와 일을 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웃음) 현재 강풀 작가 원작의 좀비영화 <당신의 모든 순간>을 준비 중이기도 하다.

-대기업과 거리를 두고 영화를 만드는 것이 고통스러울 텐데. =나도 대기업으로부터 투자받아서 영화하고 싶다. 왜 그러고 싶지 않겠나. 기준, 원칙, 조건이 맞으면 한다. <흡혈형사 나도열2>는 그런 방식으로 할 것 같다.

-지난 4년 동안 영화를 한편도 못 만들었다. =영화 한편 만드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웃음) 다시 말하면 4년 동안 한편도 못 만들었다는 것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관객과 시스템의 변화도 느껴지나. =<도가니> <완득이> <부러진 화살> 등의 흥행을 보면 상업적인 웰메이드영화보다는 거칠지만 정서적으로 호소하는 영화들이 좋은 반응을 얻는 것 같다. 관객 성향이 근본적으로 변한 건 아니고 어떤 주기의 문제인 것 같다. 시대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시스템은 여전히 중소배급사가 견디기 힘든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NEW와 시너지가 가는 것을 보면 존경할 만한다. 한때 청어람도 그걸 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 유지하지 못했다. 일단 제작하는 영화에 집중해야 할 때다. 그래야 언젠가 청어람을 시작할 때 세웠던 계획들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 같다.

-<26년>은 대선 전 개봉이 목표다. 총선과 대선이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 같나. =영화를 잘 만들어야 모든 것이 풀리지. (웃음) <씨네21> 기자들도 후원 좀 해라. 나중에 이름 확인해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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