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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사춘기에 팝을 안 들었어요”

고현정_형제 중 첫째죠? 맏이로 살면서 힘들었던 점은 없어요? 저는 척 봐도 맏이 같지만 김동률씨는 둘째처럼 보이는데….

김동률_아니, 저도 맏이 성격이에요. 꽤 오랜 시간 어른 말씀, 부모님 말씀은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내면화돼 있었어요. 삼남매 중 부모님 기대에 가장 부응했던 것도 맏이였던 이유가 클 거예요. 스스로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피아노도 제가 제일 오래 배웠어요. 요즘 동생들 만나 술 한잔하면 오빠는 모르는 누이동생들의 비애에 관한 뒷이야기가 나오죠. (웃음) 저를 탓하는 건 아니고요. 순응하며 성장한 콤플렉스 비슷한 것이 있어요. 아티스트는 좀 똘끼가 있어야 하잖아요?

고현정_그렇다고 알,려,져 있죠. 혼자 있는 시간에 튀어나오는 기질도 없나요?

김동률_별로 없어요. 세상이 정한 규칙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부잣집은 아니었지만 학생 시절 공부만 하면 다른 걱정은 없었고 데뷔 뒤에는 매니저가 다 챙겨주면서 살았잖아요? 진취적이거나 용감하다고 할 수는 없죠.

고현정_그런 면에 대한 스트레스나 아쉬움은요?

김동률_스트레스보다 성격이 달랐다면 다른 종류의 음악을 하고 다른 삶을 살았겠구나 하는 생각은 해요. 가령 듣고 싶은 음악은 대학 가서 들어라, 지금 음악을 듣느라 공부를 소홀히 해서 대학에 못 가면 평생 후회할 거라고 어머님이 충고하셨을 때 “무슨 상관이야, 난 바로 지금 음악이 듣고 싶어”라고 할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저는 나름대로 타협을 해서 그럼 클래식과 가요는 듣되 팝송은 나중에 듣자고 스스로 봉쇄를 했어요. 가요만 해도 이렇게 좋은 음악이 많은데 팝송은 감당이 안될 것 같아서요. 결국 스무살에 데뷔해 음악을 하는데 비틀스도 몰랐어요. 제게 비틀스는 ‘<예스터데이>의 비틀스’였던 거죠.

고현정_어머 난 어릴 때부터 다 알았는데! 김동률이 비틀스도 몰랐다니 이런 얘기 정말 좋아요. (웃음)

김동률_다른 인터뷰에서도 한 이야기지만 1994년 대학가요제에서 <꿈속에서>로 상을 타고 MBC 라디오에 나갔는데 PD가 “배리 매닐로 좋아하지?” 묻기에 (서)동욱이랑 나랑 아주 좋아한다고 일단 답하고 집에 오는 길에 《파라다이스 카페》 CD를 산 적이 있어요. (웃음) 말하자면 저의 음악적 백그라운드는 편식적이고 기형적이에요. 예민한 사춘기에 팝을 안 들었고 음악인이 된 뒤 공부하는 기분으로 닥치는 대로 팝을 들은 거죠.

고현정_반면 클래식 음악에는 많은 영향을 받았죠?

김동률_부모님이 워낙 좋아하셔서 늘 클래식 FM을 틀어두셨어요. 찾아듣기보다 공기처럼 친숙했죠. 그럼에도 저란 사람의 취향은 역시 대중적이다보니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은 고전기 작곡가보다 라흐마니노프, 차이코프스키 같은 낭만파 작곡가들을 선호했어요. 고3 가장 힘든 시기에는 정경화 선생님이 연주한 엘가의 《사랑의 인사》 CD를 몇 천번씩 돌려 들었어요. 부모님이 나이 들면 취향이 달라질 거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도 맞아요. 예전에는 딱딱하고 틀에 갇힌 것만 같았던 음악의 아름다움을 지금은 이해해요. 예를 들어 브람스.

고현정_만약에 자식이 생겨 음악에 빠진다면 기성세대가 해줬던 조언을 해줄 건가요?

김동률_(생각) 경고는 해줄 것 같아요. 판에 박힌 조언 말고 아이가 생각해서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있게. 고3 때 울며불며 음대 간다고 난리쳤을 때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가난한 집에서 자라 음악을 좋아해도 접할 기회가 없었던 당신의 과거작를 생각하면 공부하다 힘들 때 피아노 칠 수 있는 네가 무척 부럽다고. 나도 일하다 피곤할 때 연주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고. 그런데 네가 음악을 직업으로 택하면 음악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어디서 풀 거냐 물으셨어요. 어린 나이에도 납득이 됐어요. 그래서 음대에 가지 않은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그때는 몰랐지만 작곡과 가면 현대음악만 주로 가르친다고 하더군요. 저는 현대음악은 관심없거든요.

대중을 ‘진두지휘’하고 싶은 바람

고현정_근래 본 영화는 뭐예요? 좋았던 여배우는요?

김동률_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내가 사는 피부>요. 예술이던데요? (웃음) 그 영화는 아무것도 모르고 보시는 게 나아요. 전작 <브로큰 임브레이스>를 보고는 힘이 좀 빠지셨구나 했는데 이번 영화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흡사 20대나 30대 초반 감독이 기획해서 밀어붙인 듯한 아이디어와 에너지에 넋을 잃었어요. 여배우는… 영화는 별로였지만 <더 콘서트>에 나왔던 멜라니 로랑 좋아해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과 <비기너스>에도 출연했죠. 예쁘기도 하지만 무표정에 많은 게 담겨 있는 입체적인 얼굴이라 매력을 느껴요.

고현정_멜라니 로랑 나올 줄 알았어요. (토라진 척) 아, 인터뷰하기 싫다. 전 발코니 파랑이잖아요.

김동률_(어리둥절) 발코니 파랑이라뇨?

고현정_아 뭐, 대충 붙인 거예요. 멜라니 로랑이 못되니까 발코니 파랑이나 한다고요. (좌중 폭소) <비기너스>에서 이완 맥그리거가 분한 역할을 김동률씨가 해도 어울릴 것 같아요. 성격이 비슷해요.

김동률_저는 연기 못해요. 연기자는 얼굴이 도화지 같아야 하는데, 전 지을 수 있는 표정에 한계가 있어요. 카메라도 무섭고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같은 대사 반복하는 능청스러움이라든가 뻔뻔함이 없어요.

고현정_어머, 그럼 배우는 능청스럽고 뻔뻔하다고 생각해요? 내가 보기엔 사람들한테 내가 노래할 테니까 오라고 돈 받고 불러 모아서 그 앞에서 노래하는 가수가 더 능청스럽다. (좌중 웃음)

김동률_바로 그 점인데요. 제가 행사를 못하는 이유가 불특정 다수 청중 앞에서 공연하는 일이 겁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거든요. 그분들은 제가 누군지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고, 좋아할 수도 있고 안 좋아할 수도 있잖아요. 들을 준비가 충분히 안된 청중 앞에서 노래하는 일은 큰 부담이에요. TV도 같은 이유에서 마찬가지고요. 반면 콘서트에 오신 분들은 티켓 값을 치른 만큼 기본적 관심의 토대가 있고 저는 그분들이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해서 좋은 시간이었다고 웃으면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면 되잖아요.

고현정_제가 임신했을 무렵 김동률씨 콘서트에 간 적이 있어요. 아이를 가져서인지 모르지만 “노래만 듣긴 좀 그렇다, 재미가 있어지려나 아니려나” 슬슬 좀이 쑤시는 참에 이적씨가 무대에 나왔어요. 확 재밌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두분이 왜 헤어졌을까, 계속 같이 하면 좋겠는데 하는 생각을 했어요. 콘서트에서 이적씨처럼 관객을 즐겁게 하려는 시도도 하나요?

김동률_카니발(김동률과 이적의 프로젝트 그룹) 활동이 끝난 뒤 1998년에 솔로 1집 내고 한 공연이었을 거예요. 요즘 공연은 짜임새가 많이 나아졌어요. 저, 콘서트에서 춤도 춰요. 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가 의문이지만. (웃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공연을 할 수는 없어요. 대신 제 스타일의 공연을 보고 싶은 분만큼은 책임지겠다는 태도는 있어요. 스스로 곡을 쓰고 음반 내용을 기획해 끌고 가는 입장이다보니 어느 순간 대중음악가는 대중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지만 대중에게 맞춰가느냐 이끌어가느냐는 매우 다른 문제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전 후자를 원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시간이 흐르다보면 김동률이라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뒤따라오던 사람들의 행렬이 짧아질 수는 있지만 그래도 그들이 지금 내가 어디로 가기 위해 이 음악인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은 명확하게 알 수 있도록 ‘진두지휘’하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저번에 우리 갔던 데 좋았죠? 이번에는 이런 데로 데려갈테니 믿어주세요” 하는 거죠. 어쩌면 굉장히 큰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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