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자리를 잡고 제일 먼저 듣게 되는 게 역시 ‘인문학의 위기’라는 담론. 대학 밖에서 그것은 한가한 관념론적 위기이지만, 대학 안에서 그것은 냉엄한 유물론적 위기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사·철에 속하는 학과들이 통폐합되는 그런 문제다. 이 경우 인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자리를 잃거나, 아니면 자신의 전공과 관계없는 엉뚱한 과목을 가르치게 된다. 독문학이나 불문학 교수들이 졸지에 영어를 가르치는 황당한 사태는 이미 현실이다.
위기는 실은 아주 오래전에 시작됐다. 대학의 전신은 중세의 신학교. 르네상스 이후 대학이 세속화한 이후에도 대학은 중세 특유의 사변적이고 관념적 특성을 오랫동안 그대로 유지했다. 당시의 엘리트들은 학문은 생업과 관계없는 고상한 정신노동이라 생각했다. 물론 거기에는 하층민들의 영리활동은 천박한 육체노동이라는 신분적 편견이 깔려 있다. 이른바 ‘자유교양’(liberal arts)라는 말에서 ‘자유’란 육체노동으로부터 해방을 뜻한다.
중세에 학문적 활동이란 곧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영원불변한 진리의 세계를 정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했다. 이를 ‘테오리아’(theoria), 즉 ‘관조’(觀照)라 부른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와 학문이 세속화하면서 연구의 대상 역시 신적 진리에서 세속적 진리로, 즉 자연과 사회의 원리로 바뀐다. 이로써 ‘관조’(theoria)는 ‘이론’(theory)이 된다. 하지만 이때조차 학문은 여전히 실용성과는 관계가 없는 순수 정신적 활동으로 남아 있었다.
과거에는 ‘문리대’, 즉 인문학과 기초과학이 대학의 정수였다. 하지만 오늘날 대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문과에서는 경영대, 이과에서는 공대일 것이다. 독일의 경우 70년대 초만 해도 공대는 아직 ‘대학’(universitat)이 아니라 ‘전문학교’(hochschule)라 불렸다. 왜? 순수학문이 아니라 실용학문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대학의 본령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학문의 세속화는 근대 이후 그치지 않고 이어져왔다.
학문의 산업화
근대가 과학의 시대였다고는 하나, 사실 산업혁명 때까지도 과학은 실용성이 전혀 없었다. 산업혁명은 과학자가 아니라 실은 기술자들의 발명품이었다. 여기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50년대, 과학혁명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경제는 과학의 도움 없이는 기술의 혁신이 이루어지기 힘든 단계로 접어든다. 이때부터 이른바 ‘산학협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순수과학은 공학의 발전에 필요한 ‘기초학문’으로서 중요성을 인정받는다.
문제는 인문학이다. 이 애물단지를 어찌할 것인가? 하지만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기계공학에서 정보공학으로 이행하면서, 인문학에는 뜻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사회 전체에 미디어의 망(network)을 깔아놓은 다음에 당장 떠오르는 물음은 이런 것이다. ‘그 망을 통해 무엇을 흘릴 것인가?’ 이른바 ‘콘텐츠’가 중요해진 것이다. 그 콘텐츠는 당연히 문·사·철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인문학에서도 산학협동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에서 인문학의 산학협동은 불행히도 ‘하청’의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게임의 소재, 영화의 줄거리, 광고의 카피로 사용될 콘텐츠를 발굴해 납품하라는 식이다. 결과는 소재의 난개발. 시대정신(?)에 부응하기 위해 대학들은 앞다투어 전통적 인문학의 분과를 폐하고 ‘콘텐츠 학과’라는 해괴한 것을 만들어냈다. 문·사·철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디서 콘텐츠를 얻겠다는 얘길까? 아무튼 이 산학협동은 불행히도 인문학의 질적 저하만을 초래했다.
영상과 구술의 문화
지금 인문학에 관한 수준 높은 강의와 연구는 대학이 아니라 차라리 ‘수유너머’나 ‘철학 아카데미’와 같은 학문공동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학의 인문학은 왜 몰락하고 말았을까? 가장 큰 이유는 마셜 매클루언이 말한 ‘구텐베르크 은하의 종언’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소통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더이상 문자(text)가 아니라, 영상(image)과 음성(sound). 과거의 대중이 정보를 얻기 위해 책을 읽었다면, 오늘날의 대중은 정보를 보고 듣는다.
인문학자들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변화를 맞았다. 아무리 영상과 음성의 시대라 하더라도, 문자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는 영상, 우리가 듣는 음성은 어디까지나 문자-숫자(alpha-numeric) 코드로 프로그래밍한 기술적 영상, 기술적 음성이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비가시적(invisible)으로 변했을 뿐이다. 그것은 영상과 음성의 바탕에 콘티, 시나리오, 스크립트 혹은 프로그래밍의 형태로 침전되어 있다.
사진이 등장했을 때 회화가 그랬듯이, TV가 등장했을 때 라디오가 그랬듯이, 인문학이라는 ‘올드미디어’는 이미지와 사운드라는 ‘뉴미디어’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새로 정의해야 한다. 변화한 매체환경 속에서 텍스트는 이미지와 사운드와의 관계 속에서 사고되어야 한다. 대중을 위한 텍스트는 이미지처럼 구체적이고, 사운드처럼 구술적이어야 한다. 아니면 앞서 말한 것처럼 스크립트가 되어 이미지와 사운드의 바탕에 비가시적으로 깔려야 한다.
인간에 관한 학문
많은 인문학자들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은 인문학의 연구대상 자체가 변했다는 사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문학(human science)의 대상은 ‘인간’(human)이다. 문제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인간 자체가 변했다는 점. 월터 옹이 이야기한 것처럼 “미디어는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과거에는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말했지만, 현대의 대중은 디지털 이미지와 사운드로 만들어진다. 전자 매체, 특히 디지털 매체는 현대인의 의식을 완전히 재구조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자들은 여전히 학생들에게 700페이지짜리 셰익스피어 전집을 가르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은 광고 카피를 통해 시적 체험을 하고, 영화를 통해 극적 감각을 익히고, 애플 기기의 디자인을 보며 미적 취향을 형성하고, 컴퓨터 게임을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팟캐스트를 들으며 정치에 관심을 획득한다. 정말로 현대인의 생활세계를 이루는 이런 분야에 대해 그동안 인문학은 어떤 관심을 보여왔던가?
인문학의 목표 역시 ‘인간’의 형성에 있다. 하지만 어떤 인간을 목표로 삼을 것인가? 플라톤이 말하는 인간의 이데아? 실제로 과거의 인문학이 모범이 되어야 할 이상적 인간을 ‘관조’(theoria)하려 했다. 하지만 오늘날 필요한 것은 사회에서 생업을 하며 살아가야 할 세속적 인간의 ‘이론’(theory)이다. 산학협동이 순수학문의 이론을 다시 ‘노하우’(know how)로 바꾸어놓았듯이, 인문학 역시 필요하다면 노하우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학문의 세속화는 필연적이며, 어떤 측면에선 진보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변함이 없어야 할 인문학의 과제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것이다. 미처 돌아가는 사회의 번잡함에 잠시 거리를 취하고 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돌아보는 것. 오늘날에도 ‘관조’라는 게 필요하다면, 그것은 아마 이런 세속적 형태로 가능할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CEO 인문학’은 그런 반성 없는 삶의 헛헛함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성공적인 인생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이 자본주의 영웅들. 정작 그들도 자신이 왜 사는지는 잘 모르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