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가장 절박했던 아침을 종종 떠올린다. 11월의 찬 공기 속으로 뿜어져 나가던 입김, 발 아래 깔려 있던 회색 보도블록의 무늬, 응원가를 부르던 고등학생 무리와 담장 앞에 줄지어 기도하던 어머니들. 내 인생이 오늘 여기서 결정되는구나, 가슴 깊은 곳에서 비장함을 넘어 일종의 성스러운 기분이 피어올랐다. 그날은 내 두 번째 수능 시험일이었다.
12년, 아니 13년이 흘렀다. 물론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든 조자룡 혹은 장판교 위의 장비에 버금갔던 비장함이 무색하게도, 내 인생은 수능 성적표에 찍힌 백분율과 상관없이 흘러갔다. 대입과 동시에 평생 다시는 시험공부 따위 하지 않으리라 치를 떤 결과, 내 졸업 평점은 상당히 좋은 시력 정도에 불과했고 변변한 토익 성적은 물론 그 흔한 운전면허도 없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줄곧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했지만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 한번 얻지 못하고 달려온 길의 끝에는 모든 종류의 공부에 대한 거부반응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 지옥을 빠져나왔다… 고 생각했다.
그러나 JTBC <아내의 자격>은 여전히, 혹은 그때보다 훨씬 미쳐 돌아가는 학벌계급사회 대한민국의 현재를 예리하게 베어내 보는 이의 눈앞에 들이민다. 남편과 시가의 등쌀에 못 이겨 초등학교 6학년짜리 외아들을 데리고 대치동으로 이사 온 서래(김희애)는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 지켜온 가치가 ‘자식 교육’ 앞에서 모조리 부정당하고 무너지는 상황을 겪는다. “애 성적이 부모 성적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친구들 사이에선 조부모 능력이기도 하다”는 시모, “네 소신 지키자고 애를 낙오자로 만들 셈이냐”는 시부, 그리고 사교육 심층보도에서는 “어른들 줄 세우기에 놀아나는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리포팅했던 기자 남편 상진(장현성)은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이런 얘기 밖에서는 못한다”면서도 “인간 딱 두 가지야. 갑과 을, 나는 내 아들이 갑이면 좋겠거든”이라며 서래와 아이를 쥐어짠다. ‘국제중 입시 준비반’ 학원 시험에 떨어진 초등학교 6학년짜리 아이가 엄마에게 “내가 정말 큰 죄를 지은 것 같아”라며 풀이 죽는 이 미친 세상은 드라마를 위한 과장이 아니라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줄을 잇는 성적 비관 자살이 더이상 놀라운 뉴스가 아닌 우리의 현재다.
지난 2000년 MBC <아줌마>에서 대학교수 장진구(강석우)를 비롯한 지식인 계층의 위선과 가부장제의 구습에 찌든 중산층 가정의 이면을 신랄하게 보여주었던 안판석 감독-정성주 작가는 여전히 징한 눈썰미로 ‘대치동 엄마’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중산층의 사교육과 계급 상승을 위한 몸부림을 포착한다. 안판석 감독 특유의 유려한 화면 속에서 서래와 젠틀한 유부남 치과의사 태오(이성재)는 고전멜로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아련한 로맨스를 시작하지만, 선수를 올림픽에 출전시키는 코치처럼 엄마들이 전의를 다지는 초등학생들의 학원 시험장은 <하얀 거탑>의 수술신만큼이나 비장미 넘치게 그려진다. 교양있는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함에도 뒤집어보면 지독히도 속물적인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대사 하나하나가 크고 작은 가시처럼 서로를 찌르며 이 우아한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정성주 작가의 깊은 내공 덕분이다.
그래서 <아내의 자격>은 모든 것을 말로 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것을 말하고, 납치와 살인 혹은 흔한 고부간의 머리채 잡기가 등장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무서운 드라마다. 어른들이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은 좋은 성적뿐이고 제시하는 길 또한 “법과 아니면 의과”뿐인 세상, 조금이라도 ‘다른’ 문제풀이 방법을 내놓는 아이가 따돌림을 당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아서 더 공포스럽다. 그리고 사교육 없이 자유롭게 아이를 키워보려던 서래가 동네 엄마들의 비아냥거림을 산 끝에 결국 무릎 꿇고 학원 원장 지선(이태란) 앞에서 눈물 흘리며 매달리는 모습에 감정이입하던 순간, 문득 생각했다. 나는 과연 언젠가 내 아이에게 내가 겪은 지옥을 물려주지 않을 수 있을까. 한층 더 무서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