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다짐으로 빽빽이 채워진 남산 내리막길의 타일벽. 우리는 왜 구획지어진 평면을 보면 기어이 한칸 차지하고 싶어지는 걸까? 비탈의 경사를 견디며 둘의 이름을 눌러쓰고 하트를 그리는 커플들을 상상해본다. 그들 중 누군가는 뒷날 그 맹세를 지우러 왔을지도.
2월10일
서가에 책을 꽂다 말고 퍼질러 앉아 영화제 카탈로그들을 뒤적인다. 주기적으로 반복 등장하는 몇몇 표현들에 슬며시 웃음이 난다. 필자는 영화의 실체를 전달하기 위해 고심 끝에 선택한 표현이지만, 어쩔 수 없이 패턴으로 굳어버린 관용구들. 아트하우스 계열 영화들을 소개하는 경우 나 역시도 무수히 변주했던 일련의 구절들은 이따금 오락으로 영화를 즐기는 대중에게는 대피하라는 빨간불이 되고(“접근하지 마시오”) 예술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일종의 듀이 십진분류표(“선댄스 수상작풍의 서사 퍼즐 포스트 누아르인 모양이군”)로 기능할 법하다.
예컨대 “픽션과 다큐멘터리 사이의 균형을 성취하고 있다” 혹은 “대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는 누군가에겐 기승전결이 모호하고 엔딩이 어리둥절할 가능성이 높을 거라는 예고로 해석되고 “다르덴 형제의 미학을 계승한 카메라워크”는 뒷줄 자리의 예매를 권하는 조언으로 “이 영화의 초점은 무드다”는 커피를 두잔 마시고 극장에 들어가라는 귀띔으로 접수되는 것이다. 시간에 쫓겨 편의적으로 기사에 끌어다 쓴 표현이 개개 영화들 사이의 차이를 무화시키는 바람에 관객을 뒷걸음질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뜨끔하다. 물론 영화 자체가 전형에서 출발해 끝내 그 안에서 주저앉는 경우라면 리뷰 쓰는 사람이라고 해서 용빼는 재주가 있을 리 없지만.
2월14일
친애하는 A 미술감독님으로부터 문자가 날아들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보고 영화에 흔들린 나머지 눈물이 났다고 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를 사로잡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매력은, 아마 2시간짜리 영화로 옮기기에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존 르 카레의 원작이 역설적으로 기어코 영화로 재현하고 싶다는 욕망을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에게 불러일으켰던 이유와 일맥상통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비밀에 관한 연구이고, 영화는 소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것들을 매설할 수 있다. ㅁ자형 건물 중정에 떡하니 박혀 있는 ‘서커스’(영국 첩보부의 별칭) 본부의 독특한 설계, 무늬인지 요철인지 착시를 일으키며 몽롱한 진공을 연출하는 벽, 여느 사무실의 ‘절전’ 포스터처럼 태연히 붙어 있는 “전화 통화는 안전하지 않음을 명심할 것”(Remember Telephone Talk is not Secure)이라는 표어. 마리아 듀코비치 미술감독이 베이지와 잿빛, 마호가니색으로 연출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공간은, 극중 인물들이 속한 조직의 성격에 대한 개괄적 설명을 과감히 생략하고 진짜 감정을 사무적이고 의례적인 대화 속에 은닉한 이 영화에서, 첩보원이 처한 삶의 환경과 후천적 품성을 암시하는 무언의 가이드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난해하다.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은 사건의 우여곡절도 감정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원작을 알아듣기 쉽게 압축하고 요약하는 대신, 빈 곳은 빈 곳대로 내버려두고 가장 미묘한 순간들을 떼어내 등신대의 이미지로 옮겨놓는 각색을 택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마스터 숏’이 없다.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점묘파의 그림을 가까이에서 보면 모둠얼룩에 지나지 않는 현상과 비슷하다. 서사의 결승점은 이중간첩의 색출이지만 그 과정은 내부자의 시선으로 본 스파이라는 직업의 디테일과 사무실 정치학으로 채워진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40년 전 세계를 그린 시대극 장르물로 이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에게 어려울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내부적으로는 교착상태에 빠져 있는데도 외부에서는 성과를 칭찬받는, 실무자라면 한번쯤 당면해본 어이없는 상황부터, 긴 세월 적성국의 허점을 파악하다보니 상대 체제의 장점까지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되는 첩보원의 아이러니까지 두루 포함된다. 글 쓰는 사람으로 치면 직접인용을 하느냐 간접인용을 하느냐 같은 시시콜콜한 결단과 그에 따르는 오직 동업자만 알아보는 자존심 문제가 밀고 가는 영화인 것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는 많은 인과관계가 엉켜 있는데 (원작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중 논리로서의 이유는 복잡한 조직 메커니즘 속에서 허무해지고, 심리적 동기로서의 이유는 극히 내밀한 곳에 묻혀 있다. 게다가 이 둘은 때로 표면적으로 뒤섞인다. 이를테면 적국 첩보원을 회유, 매수하는 임무를 담당한 요원 리키 타르가 <이창>의 제임스 스튜어트처럼 맞은편 건물의 여인을 정탐하다가 “나는 그녀 안에 뭔가가 있음을 느꼈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사랑의 시작을 가리킴인지 건수를 냄새맡은 첩보원의 후각인지는 정확히 판별되지 않는다. 영원한 외부자이기에 탁월한 관찰자고, 뛰어난 관찰자이기에 어느 순간 상대의 영혼과 직면하는 스파이들의 곤란한 숙명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휘감고 있는 멜랑콜리의 정체이며 이런 정서는 이야기의 변두리에 등장하는 외로운 전학생 소년 빌의 얼굴에 응결되어 있다.
2월15일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남긴 아쉬움이 있다면 서사를 추동하는 ‘두더지’, 즉 이중간첩이라는 위치에 대한 묘사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중간첩이란 배신의 아이콘을 넘어 너무 많이 알기에 두 체제의 이면을 다 파악하고 대립하는 세계를 주물럭거리기로 결심한 회의주의자고 극도로 독립적이고 자존심 강한 뛰어난 인물이 택할 만한 길이라는 점을 더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 자꾸 곱씹게 된다. 한 가지 더. 수고한 번역자에게 무례한 표현이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첩자’는 자막이 아닐까 두어 차례 생각했다. 이 영화처럼 퍼즐 조각이 군데군데 빠진 채로 제시되는 작품일 경우 의역은 오히려 위험하다. 섣불리 관객에게 ‘보호자연’하는 자막은 중의법의 뉘앙스를 졸아붙게 할 뿐 아니라 그나마 관객에게 주어진 단서들을 오염시키는 셈이 되어 혼란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월16일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디센던트>가 지닌 미덕의 리스트는 꽤 길지만, 내가 새긴 지엽적 교훈 하나만 적어두기로 한다. 오늘은 못마땅하고 원망스럽다고 해도 근본적으로는 소중한 사람들과 만났다 헤어질 때마다 우리는 어떤 다툼이 있었건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점을 은연중에나마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우리의 인생은 온갖 사고로 점철돼 있기에 지금 나누는 작별인사가 그와 나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2월22일
김민희 배우는 모델형의 연기자다. (옷을 잘 입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녀는 금세 사라져버릴 듯한 단편적 이미지 속에 복합적인 감정을 담아내는 재능이 있으며 대사(의 많고 적음)는 그녀의 연기에 결정적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 잊을 수 없는 연기를 보여준 아역배우들의 힘과 비슷하다고 해도 좋다. 이런 유형의 배우가 적역을 만났을 경우 어떤 테크니션형 명배우보다 더한 파괴력을 발휘하는 경우를 종종 보는데 <화차>는 김민희에게 그런 영화다. 연약하고도 단호한, 비정하고도 가벼운 김민희 특유의 몸놀림은 짓밟힌 상태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로 결단한 선영에게 잘 어울리며, 선영이라는 캐릭터가 등장 분량의 상당부분이 애인 문호(이선균)의 회상과 추적자 종근(조성하)의 상상을 통해 필터링된 ‘환상의 여인’이라는 점도 이 배우가 가진 휘발적인 매혹에 들어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