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보다가 우연히 ‘댄디’라는 낱말에 시선이 꽂힌다. 분위기를 보니 요즘은 주로 패션의 영역에서 ‘댄디’ 얘기를 하는 모양. ‘댄디룩’? 이는 1990년대 일본에서 유행하던 어법이 한국으로 건너온 것으로 보인다. ‘댄디’라는 말이 사용되는 또 다른 처세술에 관한 담론이다. “댄디즘을 통해 자신의 카리스마를 구축하라.” 물론 이런 어법들은 ‘댄디’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지만, 18~19세기 유럽을 풍미했던 ‘댄디즘’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최초의 댄디
인터넷 백과사전은 ‘댄디’(dandy)란 “세련된 복장과 몸가짐으로 일반 사람에 대한 정신적 우월을 은연중에 과시하는 태도”로 규정한다. 하지만 ‘댄디’는 사람을 가리키므로, 그 기술은 차라리 ‘댄디즘’(dandyism)의 정의라 해야 할 것이다. ‘댄디’는 18~19세기 영국에서 독특한 복장과 취향과 매너를 통해 즐겨 자신을 현대의 귀족으로 연출하던 이들을 가리킨다. 그들 대부분은 물론 고귀한(?) 혈통이 아니라 중산층 출신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근대적 댄디는 조지 브러멜(1778~1840)이라는 영국인. 그 역시 귀족이 아닌 중산층 출신으로 독특한 옷차림으로 당시 런던은 물론이고 유럽의 패션을 주도했다. 의상만이 아니라 기질도 독특했던 모양이다. 특유의 오만하고 냉담한 태도로 풍자와 독설을 내뱉으며, 사교계에서 스캔들을 일으키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건방짐이 외려 묘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그는 조지 4세의 궁정에서 일약 사교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이 괴짜(?)가 매력적 존재로 여겨진 것은 당시 사회에 평균에서 벗어난(eccentric) 독특함에 대한 취향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유명하기로 유명”했던 브러멜은 부친으로부터 거액을 상속받았으나, 전 재산을 사치와 도박으로 탕진한 뒤 빚쟁이에게 쫓겨 프랑스로 도피했다가 그곳의 정신병원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브러멜 이후 영국에서 ‘댄디’는 상당히 피상적으로 이해되어 옷차림이 세련된 신사라는 통속적 의미를 갖게 된다.
프랑스에서 댄디즘은 정치적 현상이었다. 혁명 이후 파리의 거리에는 ‘황금청춘’(jeunesse doree)이라는 청년 그룹이 나타났다. 이들은 혁명을 지지하는 바지 입은 노동자(‘상퀼로트’)와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해 일부러 귀족적 복장을 착용하고 다녔다. 자코뱅 공포정치에 대한 정치적 반감을 복장으로 표현하기 위함이었다(혁명과 복장의 관계는 오늘날 역사학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그때 이들은 주로 브러멜의 패션과 에티켓을 모방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댄디는 그 뒤 정치적 보헤미아니즘과 합류한다. 전통과의 과격한 단절, 부르주아사회에 대한 경멸, 그리고 의식적인 자기 디자인. 이것이 그들이 내세운 삶의 원칙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영국과 달리 ‘댄디’가 그저 옷 잘 입는 멋쟁이가 아니라, 영혼의 깊이를 가진 지성인으로 다시 정의되기에 이른다. 댄디즘이 일종의 심오한 존재미학으로 이론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물꼬를 튼 사람은 작가 바르베 도르빌리였다.
도르빌리는 ‘댄디즘과 조지 브러멜’(1845)이라는 글에서 댄디즘이라는 현상을 복장보다는 정신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댄디는 “감정의 부재, 자연에 대한 두려움, 대담함과 무례함, 사치에 대한 열정, 인공성과 개성에 대한 욕구로 특징”지어진다. 그에게 댄디는 문학의 주제이자 서사였으며, 동시에 존재의 미학이었다. 콤플렉스가 있었던 그에게 댄디즘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내면과 자존을 지켜내는 심리적 기제이기도 했다.
모더니즘과 댄디즘
보들레르 역시 댄디즘을 복장에 대한 광적인 집착과는 구별되는 현상으로 본다. “생각이 얕은 많은 이들이 믿는 것과는 반대로, 댄디즘의 본질은 의복과 물리적 우아함에 대한 과도한 즐거움에 있는 게 아니다. 완전한 댄디에게 이런 것들은 그저 그의 정신의 귀족적 우월감을 보여주는 상징일 뿐이다.” 보들레르가 따르면, “이들의 유일한 위상은 자기 자신의 인격 속에 미의 이데아를 함양하고, 자기들의 열정을 만족시키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보들레르는 댄디즘을 거의 영성의 단계로까지 끌어올린다. “어떤 측면에서 댄디즘은 영성과 스토이시즘에 접근한다.” 댄디는 천박한 것을 혐오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쿨(cool)하게 금욕적(stoic) 미소를 잃지 않는다. 그에게 댄디란 한마디로 “미학을 살아 있는 종교로까지 고양시키는 사람”이다. 그가 댄디를 “거울 앞에서 사는 사람”이라 규정했을 때, 그 ‘거울’은 물론 외면이 아니라 아마도 내면을 비추는 거울을 가리킬 거다.
댄디의 유일한 관심사는 제 삶의 미학성. “진보는 오직 개인 속에서, 그리고 개인 자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이 현대의 영웅은 자신을 미적으로 완성하는 것 외에 ‘절대적으로 목적없는 존재’다. 혹시 댄디즘이 아방가르드예술의 전사(前史)가 아닐까? ‘목적이 없는 존재’는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를 닮았다.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경멸, 평등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자율적 귀족을 연출한 것은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엘리트주의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댄디’를 자처하는 껍데기들이 역겨웠던 것일까? 발자크는 댄디를 “규방의 남자, 극단적으로 독창적인 마네킹”이라 비난한다. 물론 그가 댄디즘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댄디즘’ 대신에 “우아한 삶”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는 경제적 여유를 가진 사람은 그냥 빈둥거릴 게 아니라 ‘취향’을 가지고 “극단적으로 고양된 사유에 몰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발자크의 생각은 영국에 전해져 댄디의 대명사로 통하는 오스카 와일드에게 영향을 준다.
욕망없는 욕망
보들레르가 댄디즘을 스토이시즘으로 영웅화했다면, 르네 지라르는 그 ‘쿨’한 태도의 바탕에 깔린 숨은 욕망을 지적한다. “댄디는 무관심한 냉담함(froideur)의 가장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이 냉담함은 스토아적 냉담함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을 불태우기 위해 계산된 냉담함이며, 타자를 향해 끝없이 반복적으로 ‘나는 나 자신으로 만족한다’고 말하는 냉담함이다. 댄디는 자신이 자신을 위해 가장하는 그 욕망을 다른 사람들이 모방하기를 바란다.”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욕망은 (결핍된) 대상과 (욕구하는) 주체의 이항관계가 아니다. 욕망은 삼각형이어서, 우리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타인이 욕구하는 것을 욕구한다. 대상에 냉담한 듯한 댄디의 ‘쿨’한 태도의 바탕에는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의 욕망이 깔려 있다. 가령 욕망을 포기했기에 디오게네스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허지만 모든 것을 가졌던 알렉산더는 외려 “내가 왕이 아니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지라르에 따르면, 댄디는 대상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는 제스처를 통해 타인이 자신의 욕구를 욕구하게 만든다. 댄디는 “공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무관심을 현시한다. 마치 쇳가루들 틈에 자석을 갖다놓듯이. 그는 욕망을 위해 금욕주의를 보편화하고, 산업화한다. 이 기획보다 비(非)귀족적인 게 또 있을까? 이 기획은 댄디의 부르주아 영혼을 배신한다. 이 중절모 쓴 메피스토펠레스는 욕망의 자본가가 되기를 원한다.”
댄디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나갔다. 남은 것은 ‘댄디’라는 이름의 패션과 워너비 댄디들의 인터넷 동호회뿐. 하지만 존재의 미학으로서, 혹은 욕망의 전략으로서 댄디즘은 그 누군가에게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