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말은 농(弄) 반, 진(眞) 반이다. 농담과 진담이 명확하게 구별되는 것도 아니다. 농담 안에 진담이 있고, 진담 안에 농담이 있다. 그래서 듣는 이가 간혹 그의 속마음을 오독하기도 한다. 지난해 3월, 이준익 감독은 트위터에 ‘<평양성>, 250만에 못 미치는 결과인 170만. 저의 상업영화 은퇴를 축하해주십시오~. ^^;;’라고 남겼다. 언론은 그의 ‘은퇴 선언’을 진담으로만 받아들였다. 3월15일부터 3월19일까지 열리는 제2회 olleh 스마트폰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은 이준익 감독에 대해 ‘복귀 초읽기’라는 투의 기사가 뜨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에게 지난 1년은 웃고 즐긴, 달콤한 휴식이었을 뿐이다. <왕의 남자>(2005) 이후 <라디오 스타>(2006), <즐거운 인생>(2007), <님은 먼곳에>(2008),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 <평양성>(2010) 등 매년 쉼없이 영화를 찍어냈던 그에게 물었다. 뭐하고 놀았냐고, 원없이 놀았냐고. (아래 기록에는 되도록 그의 진담만을 골라 담으려고 애썼다.)
-1월 말에 아프리카에 간다고 들었다. =튀니지. <도시락>이라고, SBS에서 하는 세계기행 프로그램 따라 놀러간다. 여행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많이 온다. 몽골에는 4번이나 다녀왔다. 국내 여행 기회도 잦다. 제주도 올레길도 가봤다. 여주 여강길도 좋더라.
-스케줄 때문에 가지 못한 곳도 있을 텐데. =쿠바하고 터키는 놓쳐서 아쉽다. 내 꿈이 오토바이 타고 실크로드 가는 거다. 그건 누가 기획을 안 해주네. 나하고 또 한명 붙어서 가면 (그림이) 괜찮을 텐데. 이완 맥그리거의 <롱 웨이 다운> 봤나. 스코틀랜드에서 케이프타운까지 이완 맥그리거가 오토바이 타고 달리는 거 보면 입이 쩍 벌어진다. 이완 맥그리거 오토바이랑 내 거랑 똑같은데. (웃음)
-점찍어둔 파트너가 있나. =몇년 전에 실제로 (엄)태웅이랑 오토바이 여행을 계획한 적도 있다. 일본 규슈에서 삿포로까지 4000km를 달리려고 했다. 일본 방송사가 중계하고 협찬사까지 붙었는데,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촬영이랑 겹쳐서 무산됐다. 아, 류승범도 오토바이 좋아하는데 정말 멋있다. 유해진도 프로급이다.
-젊을 때부터 오토바이광이었나. =가난한 집 자식이라 기타 살 돈도 없었다. <왕의 남자> 직전에 탔으니까, 6년 정도 됐나. 나중에 실크로드 여행이 성사되면 <씨네21>도 같이 가자.
-오토바이 탈 줄 아는 기자가 없다. =차타고 뒤에서 따라오면 된다. 인생 뭐 있나. 여행이지. 백날 도시에서 낑낑대봤자.
-약속한 거다. (웃음) olleh 스마트폰영화제 집행위원장직을 맡았는데, 흔쾌히 수락했나. =아니. 안 하려고 했지. 학교 다닐 때도 반장, 부반장을 제일 싫어했다. ‘장’ 자 붙으면 침 뱉어주는 성격이잖아, 내가. 그런데 이번에 어쩔 수 없이, 얼떨결에 맡게 됐다. 누구는 좋은 부업 생겼다고 할지 모르겠는데 사실 영화제쪽에서 예산 부족하다고 돈도 안 준다. (웃음)
-1회 때는 정정훈 촬영감독이 연출한 스마트폰영화 <농반진반>에 출연하기도 했고, 심사위원장이기도 했다. =그때도 코 꿴 거지. 1회 때와 비교하면 (규모나 프로그램 측면에서) 업그레이드된 느낌이 있기 때문에 집행위원장을 맡긴 했지만. 이 영화제가 자리를 잡고, 고유성을 인정받으려면 시간이 좀더 필요할 것 같다. 아직은 기업 마케팅에 의존해서 영화제가 진행되는 느낌이다.
-관객이 보내온 영상을 현장 편집해 개막작으로 상영한다고 들었다. =구체적인 프로세스는 논의 중이다. 스마트폰이 일상뿐만 아니라 창작자들의 크리에이티브에까지 중대한 영향을 끼칠 신호탄임은 분명하다.
-디지털과 예술의 접합은 이전에도 있어왔다. =10년 전부터 미디어 아트는 디지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지만 기술적인 발전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어떤가. 스마트폰 혹은 DSLR 카메라는 아날로그 못지않은 해상력과 퀄리티를 갖고 있고, 이는 결국 작품이 만들어지는 기존의 방식을 전복할 것이다.
-디지털 세상을 앞서서 즐기는 얼리 어댑터였나. =얼리 어댑터는 아니고 얼리 바이어였다. 새로운 게 나오면 일단 빨리 사고 본다. 구입해놓고 사용을 잘 못하는 거지. (웃음)
-디지털 세계가 창작자 혹은 창작 과정을 어떻게 변형시킬 것 같나. 이러한 변화는 창작자 입장에서 자극제인가, 방해물인가. =후퇴가 아니라 점프시킨다. (아이폰을 보여주며) 이거 미얀마에 갔을 때 찍은 영상이다. ‘8mm’라는 앱으로 촬영한 다음 ‘아이무비’로 들어가서 곧바로 편집할 수 있다. 원하는 음악을 배경음악으로 깔 수도 있다. 이전엔 기술적인 산과 강을 건너야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지만 이젠 아이폰 하나면 다 된다. 소비자와 생산자의 경계가 옅어진 것이다. 디지털 시대 초기, 이메일은 정보 전달은 가능했지만 정서 전달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다 디지털과 영상이 만나면서 정서 전달까지 가능해졌다. SNS 역시 결국엔 영상을 주고받는 단계로까지 나아갈 것이다.
-소비와 생산의 경계가 무너질 때 기존 문화, 예술 생산자들이 위기에 처할 수도 있지 않나. =지난 100년 동안 영화는 독점을 통해 권력을 유지해왔다. 특정 소수만이 특별한 교육을 받아 영화를 만들 수 있었고 소수의 독점을 바탕으로 이윤이 창출됐다. 극장 중심의 영화 역시 향후에 차별화를 시도하겠지만 스마트폰은 기존의 영화-권력을 해체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존 영화-권력이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놓쳐서 안되는 점은 ‘나만 가질 거야’라는 식의 독점욕이 인간이 가진 가장 못된 욕망이라는 거다. 부패가 어디서 기인하는가. 게다가 이미 사유가 아닌 공유의 시대에 들어섰다. 인쇄 기술의 발달이 그러했듯이 스마트폰 역시 어마어마한 혁명을 불러올 것이다. 과거에는 글을 아는 소수만이 경쟁을 했다면 이젠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수십억명이 자유롭게 경쟁을 한다. 그걸 감안하면 위기라고 말할 수 없다.
-1월7일 정정훈 촬영감독과 함께 워크숍을 진행했다. 스마트폰영화를 만들겠다고 찾아온 젊은이들에게서 느낀 점이 있다면. =방송사의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를 모두 합하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수가 나온다고 하더라. (웃음) 스스로 자신의 소질을 확인해보고 싶은 집단 심리의 결과다. 워크숍에 선발된 30명의 수강생들 역시 마찬가지다. 30명 모두가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진 않겠지만 다들 개방되어 있고 간편한 디지털 기기와 네트워크를 활용해서 자신의 잠재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들이었다.
-스마트폰영화제 집행위원장직을 맡은 것을 두고 상업영화 복귀를 점치는 기사들이 많았다. =복귀?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영화제쪽에서 내게 이 일을 맡긴 건 마케팅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언론 노출 빈도를 높이기 위해서. 영화제쪽에서는 내 핸디캡을 잘 포장해 어텐션 효과를 얻고 싶겠지. (웃음) 잘 알다시피 글이라는 게 말보다 오류가 훨씬 많고 폭력적이다. 말은 뉘앙스가 있고, 톤이 있고, 표정이 있고, 앞뒤 맥락이 있다. 그에 비해 글은 사용하는 단어가 목적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면 다 바꾼다. 말이 안되는 논리가 거기에서 나온다. 글의 힘이 무너진 이유는 이러한 태생적인 오류와 그러한 오류를 누구나 다 알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트위터로 은퇴 선언을 한 지 1년이 다 된다. 돌아보면 어떤가. =‘메멘토’라니까. 어제 일도 까먹는데 1년 전을 어떻게 기억하나. (웃음) 트위터의 말도 웃으면서 썼다. ‘은퇴를 축하해주세요’라는 말 뒤에 방긋방긋(^^)도 넣었던 거다. 웃자고 한 건데 진지하게 받아들인 거지. 우리 사회가 경직된 탓이다.
-얼마 전엔 부산영상위원회가 주최하는 세미나 참석을 위해 미얀마, 베트남에도 다녀왔는데. =어렸을 때 할리우드영화를, 특히 <람보>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마다 왜 미국 사람이 총 맞으면 가슴이 아픈데 베트콩이 총 맞으면 통쾌한지 참 이상했다고 우스개 말을 했는데 그게 폭탄발언이 돼버렸지. (웃음) 제임스 카메론 조감독 출신이었다는 말레이시아의 한 스튜디오 사장이 나에게 와서 베트남 공무원들 앞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더라. 미얀마에 가서는 우리도 군사정권 시절에 검열 많이 당했다고 말해서 통역하는 사람이 애 좀 먹었지. 미얀마도 군사정권이고, 검열하는 나라잖나.
-지난해 구상한 신작 아이템 중 하나가 윤동주에 관한 영화였다. =방송사의 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관심을 갖게 됐다. 한국영화들은 이제까지 식민지 시대와 그 안의 인물을 다룰 때 자극적인 소재를 과도한 스펙터클로 담으려 했다. 그러한 동물적인 저항 말고 다른 방식으로 그 시대를 그릴 순 없을까 생각하던 차에 윤동주가 눈에 들어왔다. 어찌할 수 없었던 한 인간, 그 식물적인 인간의 내면이 궁금했다. 그래서 교토에 갔을 때 윤동주가 다녔던 도시샤 대학도 가보고 그랬는데, 그 시대 풍경을 재현하는 것이 쉽지 않아 일단 미뤘다.
-다른 아이템은 뭐가 있었나. =여러 가지 많은데. 말하면 누가 씹을까봐 싫다. (웃음)
-하나만 더 이야기해달라. 영화사 아침(<평양성> 제작사)쪽에서도 궁금해하더라. 관심사를 알아야 좋은 시나리오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싫다니까. 싫어. 요즘 내가 언론에 대한 성의가 좀 없어졌지? (웃음) 뭐든지 안 하자 주의야. 고무줄을 감지 않고 하늘로 던져진 글라이더 같은 느낌이랄까. 원래 계획, 계산을 잘 안 하는데 영화 찍으면서 너무 진절머리가 나서인지도 모르겠다. 나이 먹으니 과도한 욕망, 자의식, 독선에서도 좀 벗어나고 싶고. 그래서 즉흥적으로 살려고 한다. 뭐, 이러다가도 때가 오면 하겠지.
-언제 복귀할지도 말 안 할 건가. =라이프 이스 서든이라고. 노 플랜, 노 프라미스, 저스트 서든이라니까. 이 인터뷰도 느닷없이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