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을 버리고 블랙베리를 선택했다. 처음 손에 쥐었을 때부터 심란했다. 기존 사용자들은 온갖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어플은 IOS와 안드로이드를 위해서만 만들어질 뿐이다.” “블랙베리 메신저 때문에 블랙베리를 썼지만, 이제는 카카오톡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메일이 끊기지 않고 잘 들어온다는 것도 더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다.” 결론은 ‘간지’ 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데, 굳이 쓰고 싶냐는 경고였다. 블랙베리의 제조사인 림(RIM)이 판매량 저조로 구조조정을 했다는 소식, 애프터서비스를 맡기면 국내에서는 수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싱가포르로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블랙베리를 선택한 건, 그들의 불평에 담긴 짙은 애정이 흥미로워서였다. 그들은 이 재미없는 스마트폰을 쓰는 자신을 스스로 희화화하고 있었다. “재밌는 게 하나도 없어서 조카들이 갖고 놀려 하지 않으니까 마음이 너무 편해요.” “지하철에서 시간 때울 게 없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읽게 됐어요.” 블랙베리에 대한 정을 떼는 일이 그토록 힘겨워 보였다.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지만, 결국 세상의 흐름에 밀리고 말았다는 드라마틱한 역사가 지닌 ‘스토리’에 대한 애정일 수도 있다. 많은 리뷰를 보면서 이상하게 나도 그들의 세계에 동참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림(RIM)이 망해간다고 하니,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스마트폰이라기보다는 곧 사라질지 모르는 역사적인 애장품으로서 블랙베리를 갖고 싶었다.
지금은 나 또한 블랙베리에 대한 심란함을 털어놓는 걸 즐기고 있다. 블랙베리가 뭐가 좋냐는 질문에 “<천일의 약속>에서 김래원이 쓰는 휴대폰이 블랙베리 9900인데, 이 스마트폰에 대한 긍지는 이 정도”라고 말했고, “서울버스 어플이 잘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버스를 기다리다가 그냥 걷는 경우가 많아 운동이 된다”고 했다. 지난해 10월. 블랙베리가 4일 정도 먹통이 됐던 사건을 두고 위키리스크가 “월가의 시위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의도적으로 불통시킨 것”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했을 때는 괜히 뿌듯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블랙베리는 내가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시키는 중이다. 휴대폰을 망가뜨려 본 적이 없던 내가 액정을 깨먹었고, 그래서 지금 나의 블랙베리는 싱가포르에서 수리를 받으며 체류 중이고, 덕분에 난생처음 임대폰이라는 걸 쓰게 됐다. 그리고 이번 설날에는 림(RIM)의 CEO가 사임했다는 뉴스를 봤다. 블랙베리에 대한 내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이게 블랙베리를 쓰는 진맛이겠거니 생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