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이라는 말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보헤미안’이란 “속세의 관습이나 규율 따위를 무시하고 방랑하면서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시인이나 예술가”를 가리킨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보헤미아니즘’이라는 항목 아래 이렇게 적고 있다. “비관습적 라이프 스타일의 실천. 종종 비슷한 마인드를 가진 이들끼리 어울리며, 항구적인 결속 없이 음악, 예술 혹은 문학에 종사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보헤미안은 뜨내기, 모험가, 방랑자라 할 수 있다.”
문학적 집시들
푸치니 오페라의 제목 ‘라보엠’은 원래 ‘보헤미아 여자’란 뜻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보헤미안은 서유럽의 로마니(Romany)족, 이른바 ‘집시’를 말한다. 이들이 ‘보헤미안’이라 불리는 것은 그들이 서유럽으로 들어올 때 주로 보헤미아(지금의 체코) 지방을 거쳤기 때문이다. 이들의 삶이 어땠는지는 영화 <집시의 시간>에 잘 나타나 있다. 보헤미안은 대개 거처나 직업 없이 절도나 구걸과 같은 비정규적 방식으로 삶을 이어나가는 사회 하층의 주변부 인생들이다.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 ‘보헤미안’은 19세기에 처음 나타났다. 당시에 유럽의 주요 대도시에는 주변화한 삶을 사는 가난한 기자, 문인, 예술가 집단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대개 정치?사회적으로 비정통적이며 반체제적인 성향을 보였다. 특히 프랑스에서 문인과 예술가들은 당시 집세가 싼 변두리 지역에 모여 하층민인 집시들과 이웃하며 살았다고 한다. 특정 인종집단을 가리키던 용어가 예술가적 라이프 스타일을 가리키는 용어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보헤미안이라는 용어는 오늘날 특정 부류의 문학적 집시에 대한 기술로 널리 받아들여진다. 어디에 살며 무슨 언어를 구사하든지 보헤미안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삶과 예술에서 관습성을 벗어버리려는 예술가나 문인이다.”(‘웨스트민스터 리뷰’, 1862) 서로 다른 나라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구사하며 살더라도 집시가 원래 하나의 114인종이듯이, 세계 주요 도시의 보헤미안들 역시 국적과 언어는 달라도 문화적으로는 하나의 종족이라 할 수 있다.
‘보헤미안’은 굳이 주류사회의 인정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 사회의 주변부로 물러난 아웃사이더로, 그들에게는 종종 의복의 관습이나 결혼의 의무에서 자유로운 방탕한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무교양과 속물성을 사정없이 비웃는 지적 오만함 역시 보헤미안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집시에게 도덕과 법률, 체면과 예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보헤미안’은 이 집시들의 생존방식을 자유인의 존재미학으로 승화시킨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보헤미아니즘(bohemianism). 창조적인 지식인들의 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은 19세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먼저 소설을 통해 구체적 형상을 얻게 된다. 가령 <보헤미안 삶의 장면들>(1845)을 발표한 프랑스의 앙리 뮈르제르. 그가 모아놓은 이야기들은 뒤에 푸치니가 <라보엠>(1896)을 쓰는 데 토대가 되어준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는 윌리엄 새커리가 <허영의 시장>(1948)을, 그보다 좀 늦게 스페인에서는 발레 인클란이 <보헤미아의 빛>(1920)을 발표한다.
보헤미안의 라이프 스타일을 하나의 존재미학으로 정식화(?)한 사람은 바로 노르웨이의 작가이자 철학자이며, 동시에 무정부주의 활동가인 한스 헨릭 예거(1854~1910)였다. 1886년에 그는 보헤미안의 존재미학을 담은 저서(<프라 크리스차니아 보헤멘>) 때문에 형을 선고받고 두달 동안 감옥에 구금되기도 했다. 사법당국의 눈에는 그의 저서가 풍속을 현저히 해치는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 유명한 ‘보헤미안의 9계명’은 바로 이 책에서 유래한 것이다.
보헤미안의 9계명
당시에는 허무주의, 무정부주의, 공산주의 사상이 전 유럽을 휩쓸고 있었다. 세기말의 이런 급진적인 분위기 속에서 예거는 크리스차니아(오슬로)에서 ‘크리스차니아의 보헤미안’이라는 지식인 그룹을 결성하는데, 거기에는 북구 상징주의 회화의 대표자 에드바르트 뭉크도 끼어 있었다. 예거와 뭉크를 비롯한 ‘보헤미안’ 그룹의 성원들은 연애의 자유와 부르주아지의 타도를 외쳤으며, 사회의 모든 악의 근원이 기독교에서 유래한다고 믿었다.
‘크리스차니아의 보헤미안’들은 예거가 만든 ‘보헤미안의 9계명’을 실천하며 살았다. 계명은 다음과 같다. “① 네 삶을 적으라. ② 가족과 연을 끊으라. ③ 네 부모를 막 대하라(부모는 아무리 막 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④ 5크로네 이하의 돈 때문에 이웃을 치지 말라. ⑤ 촌스런 자들을 미워하고 조롱, 무시, 경멸하라. ⑥ 셀룰로이드 소매 달린 옷을 절대로 입지 말라. ⑦ 스캔들을 일으키기를 꺼리지 말라. ⑧ 후회하지 말라. ⑨ 스스로 목숨을 끊어라.
이 계명을 오늘날의 언어로 번역하면, ‘삶을 문학 작품처럼 가꿔나가며, 도덕의 위선에 반항하며, 사사로운 연에 얽매이지 말며, 자신의 기질을 솔직히 표현하고, 사회의 평균적 속물이 되는 것을 경멸하며, 격식 따위는 내다버리고, 필요하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를 마다지 않으며, 자신의 한 짓에 절대 후회하지 말고, 네 자신이 네 생명의 주인이 돼라’. 대략 이런 뜻이 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식으로 살면 원만한 사회생활 따위는 포기해야 할 거다.
현대의 유목민들
10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하나, 9계명은 ‘부모 알기를 우습게 보라’고 가르친다. 이렇게 ‘보헤미안의 9계명’이 구약성서의 10계명을 패러디한 것은 당시 서유럽에서 기독교란 그저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모든 화석화한 관습과 도덕의 뿌리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언뜻 보면 ‘인생 막장이 돼라’는 얘기처럼 들리나, 9계명은 그저 이 질식할 것만 같은 체제를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구축하라는 미학적 윤리의 도발적 표현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예술의 멘털리티가 어디서 유래하는지 엿보게 된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아방가르드의 예술가들은 (정치와 문화의 양면에서) 자신을 부르주아 체제와 적대 속에 집어넣고, 기성의 체제를 파괴하는 과정 속에서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사회와 예술을 구축하려 했다. 이 아방가르드의 멘털리티는 보헤미안의 감성을 물려받아, 거기에 더 뚜렷한 정치적-이념적-미학적 표현을 준 것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들뢰즈가 말하는 ‘탈주’의 존재미학은 철학적 논증의 방식으로 이 아방가르드 예술의 멘털리티를 사회적 저항의 미학으로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탈주의 미학 역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보헤미안의 라이프 스타일, 더 나아가서는 집시의 생활방식에 맞닿아 있는 셈이다. 하긴, 집시들은 원래 방랑자들(vagabonds)이 아닌가. 도덕과 염치를 모르는 이 방랑자들은 사회에서 탈주하여 글자 그대로 ‘유목적’(nomad) 삶을 살았다.
보헤미안. 이 ‘창조적 개새끼’의 존재미학이 엘리트주의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 빈곤을 실천했던 보헤미안의 라이프 스타일은 자본주의라는 욕망기계에 자발적으로 종속되어 살아가는 오늘날의 대중에게 또 다른 삶의 영감을 줄 수 있다. 온몸을 감싼 미시권력의 망 속에서도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며, 이미 존재할 이유가 없는 화석화한 관습과 도덕의 폭력 앞에서 한줌의 오만함을 갖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