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 메일로 자료를 받는 일이 많다 보니 이름만큼이나 이메일 주소를 누군가에게 불러주는 일이 잦다. 내 이메일 주소는 ‘에반스’(evans@cine21.com)다. 전화로 이메일 주소의 스펠링을 얘기하다보면, 예리한 몇몇 분들은 내 의도를 눈치채고 도로 질문을 건네온다. “기자님, 재즈 좋아하시는구나!” 정답부터 얘기하자면 재즈 좋아하는 거, 맞다. 에반스는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로부터 비롯된 이름이다. 그렇다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재즈 아티스트가 빌 에반스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의 <Waltz for Debby> <My Foolish Heart>의 연주를 정말 사랑하지만, 보사노바 앨범으로 유명한 스탄 게츠의 스펠링이 단순했더라면, 가을마다 무한 반복해 듣는 <Kind of Blue>의 마일스 데이비스가 보다 부드러운 이름을 가졌더라면 그들의 이름이 이메일 주소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결국 ‘에반스’란 이름은 경애하는 재즈 뮤지션 중 가장 부르기 쉽고 쓰기도 쉬운 이름을 가진 사람을 궁리하다 낙점되었다(마지막까지 빌 에반스와 경합을 벌인 인물은,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목소리를 지닌 쳇 ‘베이커’다).
재즈를 언제부터 좋아했느냐고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대답한다. 재즈가 재즈인 줄 몰랐을 때부터 좋아했노라고. 폼 잡으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랬다. 학창 시절의 나는 이어폰을 줄곧 끼고 사는 음악광도, 뮤지션의 앨범명과 음악 용어 등을 줄줄 꿰는 정보통도 아니었기에, 라디오에서 가끔 들려올 때마다 온몸의 세포가 쭈뼛 서는 그 음악의 장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단지 이 장르에서만큼은 피아노가 더 깊은 소리를 내고 트럼펫 소리가 허공을 찌르듯 명징하며, 드럼의 심벌즈 소리가 낙엽이 떨어지는 것처럼 스산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이 음악이 ‘재즈’라는 것을 알게 된 뒤, 음반 가게에 들렀다. 무작정 재즈 음반을 추천해달라는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에게 음반 가게 아저씨는 엘라 피츠제럴드의 베스트 앨범 <<The Very Best of Ella Fitzgerald>>를 건네줬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밤새 엘라 피츠제럴드의 진득한 목소리와 현란한 스캣을 들으며 ‘우주’를 경험했던 기억이 난다. 이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유독 올해는 재즈 음반을 사지 않은 것 같다. 대학 시절 주말마다 공연을 보러 다녔던 재즈 라이브 클럽 에반스가 올해 10주년 기념 공연을 열었다는데, 올해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에는 냇 킹 콜의 친동생 프레디 콜이 내한했다는데 나는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 여전히 재즈 음악을 좋아하고 아끼는 건 맞지만 그 애정을 표현하는 데 예전 같지 않은 나를 돌이켜보면서 내가 잃어가고 있는 것, 잊고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