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장면. 유치원 원장이 울고 있는 아이들을 후려치고 보육교사가 수면제를 먹여 재운다. 다음 장면. 임신 때문에 승진에서 누락한 워킹맘 선배가 괴성을 지르며 책상을 엎어버린다. 주인공이 승진과 육아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사이 부하직원이 가슴골을 보이며 남편을 유혹하고 욕정으로 벌름거리는 남편의 콧구멍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제야 실감이 나네. 열성팬이라 말하기 뭣하던 마의 프로그램. 2009년에 막을 내렸던 KBS2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이하 <사랑과 전쟁>)이 시즌2로 돌아온 것이다!
미치광이 같은 인간 군상을 욕하면서 보는 <사랑과 전쟁>의 입지는 이른바 ‘막장 드라마’가 차지했다. 게다 막장 드라마는 <사랑과 전쟁>이 이야기를 스톱하는 그 지점에서 조악하나마 복수의 칼춤을 추며 시청자의 혼을 쏙 빼놓지 않았던가. 시리즈의 시대착오적인 귀환을 알리는 나도 조금 궁금해진다. 이들은 왜 돌아왔을까? 새 시리즈에서는 신구를 필두로 한 조정위원회 대신 5인의 전문가로 구성된 솔루션팀이 부부의 하소연을 듣는 것으로 시작해 조언을 건네는 것으로 맺음한다. 알다시피 <사랑과 전쟁>은 화해가 목적인 극이 아니다. 닫힌 세계를 향한 외부의 조언은 대개 허망하게 미끄러진다. 개입할 수 없는 솔루션이 무슨 소용이람. 솔루션은 차라리 파국 이후의 재활에 더 적절해 보인다. 새 시리즈는 부부간의 불화에서 비롯된 감정을 자녀에게 투사했을 때 아이가 영향을 받고 반응하는 이야기를 한달 사이 두번이나 다뤘다. ‘때마침’ 고열로 응급실에 실려가는 등 파국에 불을 댕기는 극중 자녀들의 도구적 쓰임을 반성한다면 <사랑과 전쟁>의 솔루션팀은 이혼 뒤에도 서로의 문제를 어느 정도 치료해야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조언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잊지 않았다. 이 드라마는 모욕하고 모욕당하는 순간을 위해 굴러간다는 것을. 6화 ‘워킹맘 스캔들’편을 보고 있으면 잠시 품었던 기대 따위는 저만치 날아간다. 워킹맘이라는 키워드로 건질 수 있는 이슈들을 모아서 가장 선정적인 장면을 쌓아올리는 이유는 오로지 모욕을 주고받는 대파국을 위해서다. “나는 너 같은 며느리 필요없다. 며느리는 다시 구하면 되고 독사 같은 면상, 꼴도 보기 싫다!” 간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해 달려왔다는 기세등등한 시어머니를 비롯해 상사와 남편으로 이어지는 모욕의 퍼레이드. 재밌는 건 <사랑과 전쟁>은 어디서 보도 듣도 못한 기발한 모욕을 개발하는 데 공을 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랑과 전쟁>은 이슈를 소비하는 방식 그대로 다른 TV드라마를 재료로 삼는다. 드라마의 대중적인 문법을 빌려와 익숙한 장면과 대사들 사이사이 반드시 터지는 폭탄을 복선으로 깔면 이윽고 발파 버튼을 누르는 순간이 도래한다. 폭파 해체 공법으로 구조물을 무너뜨리는 장관이 몇번이고 뉴스 화면에 나오듯 <사랑과 전쟁>은 매주 금요일 밤, 무너지기 위한 세계를 쌓아올린다.
아마 카페에서 상대방에게 물을 끼얹는 장면도 처음 나왔을 때는 분노를 표출하는 신선한 표현으로 세간에 회자됐을지도 모른다. 수백번 반복되어 이제는 지리멸렬해진 드라마의 컨벤션을 환기하는 데 <사랑과 전쟁>만한 것도 없다.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사랑과 전쟁>의 귀환은 일일극과 미니시리즈의 관습적인 장면에 위기를 알린다. 아마 누군가는 반복할 거고 누구는 신체의 각종 부위나 소품을 동원한 참신한 키스장면 개발에 몰두할 거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는 대충 합의하고 넘어가는 갈등과 화해들에 의문을 품고, 변주하고, 되살려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