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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전향의 정치학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2-01-13

아큐 좌파와 좌파 등급 매기기

“황석영이나 김지하보다 강도는 훨씬 더 약하지만, 실제로 2000년대에 접어든 박노해의 변신도 일종의 ‘준(準)전향’으로 볼 여지가 큽니다. 더욱더 안타까운 경우지만, 전 진보신당 당원인 진중권씨의 점차적 전향을 우리가 바로 지금, 그의 각종 사회참여적 발언들을 통해 여실히 잘 지켜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전향이라는 과정의 연구자 분들께, 트위터와 블로그 글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전향의 과정을 심층적으로 고찰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전향의 과정

박노자 선생이 ‘레디앙’이라는 곳에 쓴 글이다. 이윽고 내가 “전향이라는 과정의 연구자 분들”에 의해 “심층적으로 고찰”되는 영광을 안게 될 모양이다. 해방 전후사에나 속하는 줄 알았던 이 단어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봤다. “방향전환의 약어이다. 따라서 정신적인 방향전환이 행동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대체로 공산주의자가 그 주의를 포기하는 경우, 진보적 사상가가 그 이념을 바꾸는 경우 등 사상적인 회심현상을 의미한다.”

내 전향 과정의 심층적 연구자를 위해 정보를 제공하자면, 나의 전향은 이미 20년 전에 일어났다. 1989년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줄줄이 몰락하는 것을 본 뒤, 약 1∼2년간의 숙고 끝에 공산주의라는 ‘주의’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의 올바름은 실천으로 검증된다”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공산주의를 표방하던 국가들의 보편적 몰락은 공산주의의 이론이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의 가장 직접적이며 물질적인 증거이리라.

그 뒤로 내 생각은 우리가 80년대에 ‘유로코뮤니스트’라 비웃던 서유럽 사민주의쪽으로 기울었다. 유학을 통해 동서독 체제를 비교할 기회를 가졌던 게 계기였다. 트라비를 타고 연 30일 휴가를 보내는 동독의 노동자와 폴크스바겐을 타고 연 40일 휴가를 보내는 서독의 노동자. 어느 쪽이 더 사회주의적일까? 당시에 접한 소련-스웨덴의 비교연구도 이른바 사회주의적 가치의 모든 측면에서 외려 스웨덴 사회가 소련보다 우월함을 보여주었다.

연대냐 전향이냐

이미 10년 전에 진보정당은 사민주의+무정부주의+녹색당(적록흑)의 이념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신념을 밝혔고, 그 뒤로는 이 생각을 바꾼 기억이 나지 않는다(다만 어떤 이가 내 이름에 붙은 ‘좌파’ 딱지를 ‘자유주의자’로 갈아붙여줬던 기억이 난다). 이 신념 때문에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될 사람을 찍어주자”던 강준만 교수와 논쟁을 벌였고, 같은 해 대선에서는 “진보정당 찍으면 사표 된다”고 외치던 유시민과 싸우기도 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박노자 선생은 나의 그런 태도를 대단히 못마땅해했다. 당시 그의 인터뷰를 보자. “노무현이 이기게 된 2~3% 표 중의 상당 부분이 민노당 지지자들의 표였을 것입니다. 만약에 민노당의 지지자들이 그런 정치적 지혜를 발휘하지 않았다면 어떤 위험한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민노당을 지지하면서도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던진 2~3%의 “정치적 지혜”를 칭찬하는 내용이다.

당시 민노당 후보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나에 대해 박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제 생각에는 진중권씨가 한국과 독일을 착각하는 것 같아요. 독일에서는 좌파가 그렇게 행동을 해도 됩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까지 정치발전에 있어 갈 길이 많이 남아 있고, 극우들이 아직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진보주의자들의 목표는 극우헤게모니를 해체하는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 이처럼 동지한테 상처를 주는 것은 비생산적이고, 극히 비정상적인 행동이죠.”

민주당 권력하에서는 민주당을 견제하는 것이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것보다 큰 과제일 거다. 거꾸로 한나라당 권력하에서는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것이 민주당을 견제하는 것보다 시급한 과제일 거다. 박노자는 이 상식을 거스른다. 민주당이 집권하던 시절에는 민주당(“동지”?)을 비판한다고 “비생산적, 비정상적”이라 비난하더니, 한나라당이 집권한 지금에 와서는 민주당과 연대하여 MB 비판한다고 ‘전향’을 했단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른바 전향자들

‘전향자’라 부를 만한 사람들이 물론 있다. 가령 수백의 추종자를 이끌고 집단 전향한 강철 김영환. 김영환의 전향을 윤리적으로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적어도 그는 공적으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했기 때문이다. 그의 문제는 논리적 성격의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잘못을 ‘잘못’ 반성했다. 그가 반성할 것은 ‘좌’라는 방향이 아니라 극단성이었다. 하지만 그는 ‘좌’를 반성한 채 그 극단성을 그대로 갖고 ‘우’로 갔고, 그 결과 극우가 됐다.

하지만 김지하나 황석영이 ‘전향’씩이나 했다니 우습지 않은가? 김지하씨는 애초에 좌익이 아니었다. 그는 사상이 필요하면 아예 자기가 셀프 메이드(“생명사상”)로 만들어 갖는 분이다. 황석영은 어떤가? 그가 북한을 다녀온 것은 넘치는 재능을 주체 못하는 딴따라(부디 용서하시라)의 객기일 뿐, 거기에 무슨 심오한 이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이명박과 함께 몽골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은 ‘전향’이 아니라 ‘경솔함’에 불과하다.

박노해는 어떤가? 그가 전향을 했다면, 그 역시 나처럼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했을 거다. 그런 식이라면 당시에 전향하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게다가 공산국가들이 무너지는 것을 버젓이 눈으로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외려 자기기만일 거다. 출소 뒤에 박노해는 나름대로 자기 길을 걸어갔다. 그 길이 맘에 들 수도 있고, 안 들 수도 있겠지만, 개인의 생각의 변화에 ‘전향’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쓸데없어 보인다.

내게 ‘전향’이라는 말은 차라리 언어의 고고학에 속한다. 식민지시대의 문인, 해방전후사의 지식인, 아무리 늦어도 반공시대의 간첩에게나 쓰던 골동품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전향’이라는 말은, 그 말로 낙인찍히는 이보다는 차라리 그 말로 낙인찍는 이의 정신세계를 더 잘 보여줄 것이다. 그 감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유명한 노래가 있다. <적기가>. “비겁한 자야, 갈 테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지금이 이런 노래 부를 시대인가?

갈 테면 가라

“전향이라는 과정의 연구자 분들께, 트위터와 블로그 글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 전향의 과정을 심층적으로 고찰해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한마디로 이 변절자(?)의 행로를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역사에 기록해 달라는 당부, 친일인명사전 편찬하듯이 전향인명사전이라도 만들 태세다. 하지만 내게는 ‘트위터’, ‘블로그’라는 용어와 ‘전향’이라는 낱말이 한 문장 안에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디지털 시대의 볼셰비키들은 클러치가 풀린 엔진처럼 현실정치에서는 공회전한다. 이념적으로 가장 급진적(?)이라 주장하는 그룹일수록 현실정치에서는 아예 존재가 없지 않은가. 이렇게 정치와 클러치가 풀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적(?) 실천이란, 고작 다른 좌파에게 등급을 매기거나, 애먼 이들에게 ‘전향’의 딱지를 붙이는 것뿐. 그걸 통해 그들은 정체성 문제를 해결하고 심리적 불안을 해소한다.

혁명적 딱지치기 속에서 정치적 ‘무능’은 이념적 ‘순수’의 증거가 되고, 정치적 ‘고립’은 윤리적 ‘우월’의 근거가 된다. 아큐 좌파들에게 보내는 인사. “만국의 노동자여, 자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