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 오브 라이프> 올해의 과대평가 외국영화
해묵은 주제와 형식 테렌스 맬릭의 영화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건 <뉴 월드>부터지만 나는 초점이 없는 서사와 추상적으로만 성격이 부여된 인물들이 어슬렁거리는 그 영화에서도 맬릭이 젠체한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는 소화불량의 예술적 야심이 체증을 일으킨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맬릭의 실책은 구체성을 가진 맥락들을 모두 거세해버린 것이다. 짐작건대 이 영화는 미국의 상흔, 특별히 <황무지>에서부터 그가 질기게 붙들고 온 베트남전의 기억이 텍스트 뒤편에 어른거리는 우화다. 열아홉살 동생의 죽음을 고지하는 우체부의 전보에서 희미하게 이런 상황이 암시되지만 기억이 형성되고 쌓여가는 의식의 흐름에 모든 걸 맡긴 채 영화는 미로를 헤매고 고답적인 상징화로 빠져든다.
구체적인 실감을 누락하고 순전히 머리로만 만들어낸 이야기다 싶게 <트리 오브 라이프>는 압제적인 의미화에만 몰두한다. 시퀀스들간의 연관성은 스칠 듯이 경미하다. 우주의 탄생과 죽음을 형상화한 장황하고 요란스러운 15분 길이의 시퀀스는 적정 수준을 초과하고 만 형국이다. 웅대한 벽화 그리기라는 작의와 이미지들이 주는 비주얼적인 경외감을 고려하더라도 거의 모든 시퀀스들이 지나치게 길고 따로 논다. 인류의 탄생과 소멸에 대한 맬릭의 이 시적인 비전이 타르코프스키의 시대에 출현했다면 아마 이 평가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이 폭력의 기율에 의해 운용되고, 인생은 도무지 공정하지 않으며, 사랑마저 상황을 나아지게 할 수 없다’는 해묵은 주제와 그것을 처리하는 영화의 담론적 형식은 너무 낡아 보인다.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이런 유의 철학적 명상은 줄잡아 수십번은 영화로 봤을 것이다.
<히어애프터> 올해의 과소평가 외국영화
삶과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알량한 태도에 경종 <히어애프터>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두 장면을 뽑겠다. 첫 번째는 쌍둥이 형을 잃은 소년이 땅에 떨어진 모자를 줍다 지하철을 놓치는 장면이다. 간결한 몇개의 숏만으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게 되는 영화적 순간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두 번째 장면을 마주하고는 그것이 믿음이 아니라 믿고 싶었던 자신에 대한 확인이었음을 깨달았다. 죽은 형의 말을 옮겨주는 조지 앞에서 소년이 갑자기 형에게 떠나지 말라고 애원한다. 그러자 방금 접속이 끊어졌다고 말했던 조지가 다시 다급히 재접속을 시도하며 소년에게 형의 마지막 당부를 전달한다. 아마 조지의 말은 거짓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자와의 소통이 산 자끼리의 위로로 대체되는 순간 종교의 위선으로부터 생의 의지가 구원된다. 그 뒤 소년과 조지 모두 먼 과거로부터의 절망이 아닌 가까운 미래로의 희망을 품게 된다. 거짓 환영에의 미혹을 멀리하는 영화적 진실이 빛나는 대목이다.
여기에 조지가 혼자 밥을 먹는 두어 장면을 더한다면 개인적인 소감으로, <히어애프터>는 삶과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알량한 태도를 엄중히 꾸짖는 수작이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필모그래피에 오점으로 남을 영화라는 혹자들의 저주도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물론 간사한 비교는 가능할 수도 있겠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나 <그랜 토리노>에 비할 바냐고 묻는다면 <히어애프터>의 손을 들어주기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올해 논란이 된 다른 영화들에 비하면 <히어애프터>는 충분히 더 얘기됐어야 할 영화다. 섣불리 거장의 평작으로 분류된 영화 앞에서 덩달아 게을러지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면 당신도 그 울림을 느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