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 올해의 과대평가 한국영화
퇴행적 운명론과 신자유주의 이념 잔치 <써니>는 여성들이 추억을 통해 개인사를 복원하고, 우정의 연대를 확인하는 영화인 양 소개되었다. 그러나 <써니>가 말하는 건 퇴행적 운명론과 신자유주의 이념이다. 게다가 거대사와 미시사를 괴상하게 접합해 여성을 탈역사적 존재로 고정하고 거대사를 조롱한다.
<써니>는 “나도 역사가 있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라 말한다. 그러나 ‘역사’란 단순한 사연이 아니라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 영화는 이들이 어떤 주체적 투쟁으로 개인의 역사를 발전시켰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춘화는 어떤 투쟁으로 자본가가 되었는지 역사가 괄호쳐져 있다. 나미가 중산층 아줌마가 된 것 또한 남편의 운발(“김서방이 이리 잘될 줄 알았니?”) 덕분이다. 이들의 과거와 현재는 아무런 접점이 없다. 결국 <써니>가 말하는 건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퇴행적 운명론이다. <써니>는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우정을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친구를 찾고 친구의 마음을 여는 모든 순간, 돈이 활약한다. 궁극적 피날레 역시 유산 잔치다. 결국 <써니>가 말하는 건 “돈이면 옛 친구도 살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 이념이다.
7공주가 새로 뭉쳐 무엇을 할까? 나미, 춘화, 장미가 뭉쳐 처음 한 일이 나미의 딸을 괴롭히는 일진들에게 명품 백을 휘두르는 드잡이질이었단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7공주파’ 자체가 지극히 배타적인 교내 기득권 모임이었음을 상기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써니>의 밑바닥에 흐르는 정서는 돈으로 자식의 성적을 관리해오던 강남 엄마가 자식이 ‘일진에 까이는’ 문제까지도 과거 자신이 잘 놀았다는 추억을 복원하여 손수 지배하려는 욕망이다. <돼지의 왕>과 함께 보면, 반동성에 치가 떨릴 것이다.
<모비딕> 올해의 과소평가 한국영화
스릴러 자장 안에 꿈틀거린 시대정신을 보라 <모비딕>에 대한 내 입장은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모비딕>에 대해 (짧게나마) 글을 쓰는 이유는 순전히 박인제의 두 번째 장편영화를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큰 흥행은 힘들겠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모비딕>의 흥행 결과는 너무나 아쉽다. 몇몇 결점에 비해 더 많은 미덕과 장점을 지닌 <모비딕>은 끝내 관객과 평단의 흥미를 끄는 데 실패했다. 사회 전반으로 좀더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거창한 음모론을 기대하거나, 거대한 음모의 실체가 반전처럼 드러날 때의 장르적 쾌감을 기대한 이들에게 다소 심심한 영화처럼 비친 모양이다. 실제로 <모비딕>의 개봉 당시 평단과 관객은 이를 영화적 단점으로 곧잘 지적하곤 했다. 음모론을 다루는 영화치고는 음모의 실체 주변을 빙빙 맴돌기만 한 덜 장르적인 영화라는 것.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모비딕>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라면 어쩌겠는가?
<모비딕>은 실제 사건의 규명 과정에 내재했던 진정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스릴러 장르의 극적 단서로 적절히 활용하며 장르적인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모비딕>은 지금은 촌스러운 단어가 되어버린 ‘진정성’의 시대 끝자락을 배경으로, 그 시대의 정신적 가치를 스릴러 장르의 자장 안에서 되살려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영화의 트렌드처럼 보였던 가학적인 ‘파국의 서사’에 매몰되지 않고 개인과 사회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견지하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 역시 <모비딕>의 미덕이다. 우리는 장르적 관습과 산업적 트렌드에 끌려가기보다는 이를 자신의 개성을 적절히 조화한 감독으로 박인제라는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시금 말하지만,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