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부터 2011년 국제영화제 수상작을 포함한 수작 외화들이 스크린에 몰리면서 동반된 특기사항은 개들의 활약이다. <네번>의 출연진을 통틀어 유일한 프로 배우인 목양견을 필두로 <비기너스> <틴틴: 유니콘호의 비밀> <르 아브르> <래빗 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디어 한나>가 ‘황금뼈다귀 상’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왈왈!
* <래빗 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2월7일
<래빗 홀>의 베카(니콜 키드먼)와 남편 하위(아론 에크하트)는 8개월 전 네살배기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집에서 기르는 개를 따라 차도로 갑자기 뛰어든 꼬마를 10대 운전자가 미처 피하지 못했다. 멱살 잡고 원망할 가해자가 없으니 <래빗 홀>은 복수극이 될 수 없다. 남은 길은 하나, 지긋지긋한 내출혈의 기록이다. 엄마가 돼본 적 없는 내가 감히 아는 척할 수 없지만, 네살짜리 아이가 남길 수 있는 나쁜 기억이 무엇이 있으랴. 잠시 강림했던 날아간 천사로 영원히 남을 뿐. 존 카메론 미첼 감독은 핸드 드립 커피를 거르듯 <래빗 홀>의 비탄을 진하게 천천히 방울방울 떨어뜨린다. 관객이 죽은 아이의 성별과 사인을 알게 되는 것도 영화가 한참 흘러간 다음이다. 극중 부부도, 영화도 한방에 이루어지는 치유는 언감생심 바라지 않는다. 영화의 끝에 이르러 둘은 재활을 계획한다. 딱 한뼘씩. 일단 섣불리 위로하기도 뭣해 눈치를 보는 이웃을 초대하자. 그리고 놀러올 이웃집 아이를 위해 장난감을 사러가자. 다음엔 그걸 포장하자. 그리고, 그리고…. 왼발과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고, 그 다음은 오른발과 왼팔을 내민다. 걷는 데에 다른 방법은 없다.
베카의 비극은 공교롭게도 대물림된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다이앤 위스트)는 오래전 장성한 아들을 약물 중독으로 여의었다. 줄곧 데면데면하던 모녀가 막바지에 말문을 연다. 베카는 심장을 짓누르는 육중한 슬픔을 가리켜 묻는다. “엄마, 이건 영원히 사라지지 않나요?” 그때 훗날 이 영화보다 훨씬 오래 기억될 듯한 대사를 다이앤 위스트가 말한다. “그건 아이를 데려가고 대신 너한테 남긴 덩어리 같은 거야. 처음에는 바위만하다 자꾸 작아지지. 결국 조약돌만해져서 주머니에 넣어다닐 수 있게 되고, 때로는 잊기도 해. 하지만 문득 손을 넣어보면 거기 아직 분명히 있다는 걸 알게 되지. …괜찮단다.” 영화에서 베카는 애도의 뜻을 전하려는 친구들을 반기지 않는다. 아니, 혐오한다. 아이 잃은 부모 모임의 멤버들도 징그러워한다. 대신 베카는 아들을 친 자동차를 운전했던 소년에게 집착한다. 집 근처에 숨어 지켜보고 도서관으로 미행하다 결국은 나란히 앉아 이야기하는 사이가 된다. 무슨 심리일까? 비록 표면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라 해도 인생에는 오로지 ‘그때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사람하고만 공유할 수 있는 화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래빗 홀>을 보면서 존 어빙의 소설에서 읽었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나이가 들면 우리는 나를 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과 어울릴 수 있다던, 그가 과거에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진다는. 노년이란 처음부터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설명하고 토론하는 피로를 감수하느니, 결석(結石)만해진 애증을 안은 채로 사소하고 진부한 것들에 대해 대화하는 일이 행복해지는 시간인가보다.
12월8일
니콜 키드먼이라는 배우에게 가장 자주 붙는 비유는 ‘도자기 인형’이다. 그녀는 희고 차갑고 부서지기 쉬워 보인다. 아무리 나른한 영화에서도 키드먼의 피부 밑에는 긴장이 흐른다. 짐짓 명랑한 척 빨리 말하고 행동하는 <래빗 홀>의 베카에게, 태엽인형 같은 키드먼의 연기양식은 잘 어울린다. 이 영화에서 베카의 대사 중에는 일단 상대 의견에 동의한 다음 ‘그래도’(though)라는 유보가 말미에 붙는 이의를 덧붙이는 경우가 유독 많은데 그건, 겉으로는 정상적인 세상의 움직임에 필사적으로 따르지만 목구멍에 차마 삼키지 못한 이물이 걸려 있는 사람의 징후처럼 들린다.
12월18일
다시 부산행이다. 일본에서 신작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Like Someone in Love) 촬영을 거의 마무리짓고 짧은 부산 나들이에 나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을 만나기 위해서다. 키아로스타미는 영화의 전당 개관기념영화제에 참석해 1990년작 <클로즈업>의 제작 뒷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클로즈업>은 영화를 동경하는 사브지안이라는 가난한 실업자가 유명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를 사칭했다가 고발당한 사건에 영감을 받아 법정을 촬영하고 연출을 덧붙여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교합한 영화다. 사브지안은 법정에서 수차례 “세상 누구도 믿어주지 않겠지만”이라고 조건절을 붙이며 난생처음 사람들에게 존중받고 존경받는 기분이 끊을 수 없는 마약 같아 사기를 멈추지 못했다고 용서를 구한다. 천만에, 왜 이해 못하겠는가. 인정받고 사랑받는 순간의 그 고양감이야말로 이 세계를 굴려가는 주요 동력인 것을.
키아로스타미 감독은 출소하는 사브지안을 진짜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이 마중하는 클라이맥스를 구상했는데, 마흐말바프의 스케줄과 날짜를 맞추다보니 사브지안이 하루 더 감옥에 있어야 하는 웃지 못할 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선처를 호소해 3개월이나 감형을 해주었으니 나를 위해 하루만 더 형무소에 있어주면 큰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키아로스타미의 요청에 사브지안은 마지못해 동의하면서도 엄청난 불평을 늘어놓았다. 드디어 출소의 날 촬영 준비는 완료되고 마흐말바프는 도착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사브지안이 나오지 않았다. 형무소에 문의하니 사브지안은 전날 미리 출소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미 출감해놓고도 불만을 늘어놓았던 이 어처구니없는 사내는 형무소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연출해서 출감장면을 찍고 마흐말바프의 바이크 뒷자리에 사브지안이 타고 가며 대화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카메라가 차로 따라가며 촬영한 이 대목의 사운드는 단속적으로 끊겼다 이어진다. 영화의 정서에 부합하는 훌륭한 음향이라는 찬사를 이끌어낸 이 연출에 대해 키아로스타미는 “실은 둘이서 (영화의 초점을 흐리는) 쓸데없는 잡담을 하도 많이 해서 고민하다가 사운드를 껐다 켰다 하는 편법을 썼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식 고백을 했다. 그리고는 “부정적 상황에서 긍정적 결과를 이끌어낸 나는 참으로 멋진 감독이 아닐 수 없다”는 귀여운 자화자찬으로 끝을 맺었다. 사실과 진실의 이 불편한 관계라니!
12월22일
퍼뜩 정신차려보니 이 일기가 실리는 잡지가 한해 영화를 결산하는 송년호다. 그래서 별점에 관한 스스로와의 작은 약속. 나는 내가 쓰는 글이 채점당하는 일이 두렵고 싫은 것과 정확히 똑같은 강도로 영화에 별점을 매기는 일이 내키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다. 하지만 이미 나는 20자평과 별점을 제출하는 일을 업무로 삼고 있다. 만약 기사도 영화처럼 판매 전에 별점이 붙여지는 ‘상품’으로 유통된다면 나 또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별점에 대한 최대의 딜레마는 거기에 공시적 잣대와 통시적 잣대가 동시에 작용한다는 점이다. 평자로서 일관성을 앞세운다면 내가 본 동서고금의 모든 영화를 한줄로 세우는 절대평가가 옳겠지만 현실적으로 영화주간지의 독자/관객은 동시에 스크린에 걸려 있는 영화 중 무엇을 볼지에 관한 가이드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나와 동료들은 효율의 원칙에 따라 2, 3주간 영화들 사이의 상대적 우열을 드러내는 별점으로 투항하곤 한다. 앞으로도 아마 이런 절충과 타협은 불가피할 것이다. 그래서 두 가지를 결심했다. 하나는 매년 12월31일(그리고 어쩌면 매 10년 말), 한해 동안 본 영화에 대해 블로그(blog.cine21.com/imagolog)에 좀더 일관성있게 재조정된 별점을 정리할 것. 둘째, 별점 0개부터 5개까지 내게 주어진 11개의 스케일을 최대한 고루 이용해 변별력을 높이도록 노력할 것. 투미하게 한다고 그 일이 안 한 게 되진 않으니까. 기껍지 않더라도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쓸모라도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