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과 패러독스’(1981)라는 료타르의 짧은 에세이를 읽었다. 거기서 그는 ‘포스트모던’을 하나의 시대(‘모더니즘 이후’)로 보는 대신에 그것을 하나의 정서, 혹은 정신의 상태로 규정한다. 지난 20년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간 ‘포스트’ 담론의 홍수를 통해 우리는 그것이 어떤 상태인지 잘 안다. 정서, 혹은 정신으로서 포스트모던이란 근대의 신앙, 이른바 근대의 ‘거대서사’(grand recit)를 더이상 믿지 않는 깊은 불신의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서사의 죽음
근대라는 시기에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은 ‘인류의 해방’이라는 서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오늘날 진정한 자유, 평등, 박애의 세상이 오리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근대라는 시대에 독일의 관념철학은 ‘정신의 실현’이라는 서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정신적 수준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어떤 면에서 활자매체로부터 멀어지는 이 시대에 사회의 교양수준은 차라리 책을 읽던 시대보다 후퇴한 느낌이다.
좌익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서사를 만들어냈으나, 아무리 늦어도 80년대 후반 이후 그 거창한 서사는 세계사의 악몽으로 드러났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적 서사가 승리한 것도 아니다. 료타르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버전이든 신자유주의적 버전이든 자본주의의 서사 역시 이미 80년대에 위기에 처했다. 자본주의의 서사는 ‘모두가 더 부유해질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모두가 더 부유해지리라는 믿음은 사라지고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본주의가 더이상 자신을 어떻게 정당화할지 모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 정당성의 위기를 자본주의는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가? 료타르에 따르면 오늘날 자본주의는 “언어를 착취한다”. 즉 매체와 정보기술을 이용해 문장들의 유통을 통제함으로써 자본주의는98굳이 체제로서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고도 그럭저럭 이 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착취란 무엇인가? 매체와 정보기술은 오직 제 언어로 번역 가능한 문장들, 즉 전자 데이터 프로세싱에 적합한 문장들만을 허용한다. 그리하여 지식인들이 미디어에서 그와 다른 방식으로 말하려 할 경우, 곧바로 대중으로부터 ‘난해하고 복잡하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프랑스의 꽤 전위적인 편집자가 어느 유명한 신문사에 자기 책을 소개 안 해주냐고 항의했다가 결국 이런 답변을 받았다. “소통 가능한 책들을 보내주시오.”
료타르에 따르면 과학이나 철학이나 예술의 문장은 전자 데이터 프로세싱과는 애초에 호환성이 없다. 왜냐하면 데이터 프로세싱은 근본적으로 “Yes-No라는 불(Boole) 대수의 이진논리(binary logic)”에 따라 기능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언어의 시장은 곧 미디어의 시장이 되었다. 그 시장에서 순환되려면 문장들은 무엇보다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과학이나 철학이나 예술은 단순한 이진논리의 시장에선 당연히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뭔가 전달하는 것(이른바 ‘정보’)을 담지 못한 문장들은 시장에서 도태된다. 문제는 과연 언어가 그저 도구, 그것도 소통의 매체에 불과한가 하는 것이다.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하는 작업의 바탕에는 언어가 한갓 도구가 아니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들은 언어 자체가 자율적이며, 그 자율적 실체의 비밀을 밝혀내는 게 자신들의 과제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시장에서 상품이 될 수 있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보’다.
코드와 메시지
이렇게 생각해보자. 소통이 가능하려면 수신자와 발신자는 코드(code)를 공유해야 한다. 가령 러시아어 문장을 한국어 사용자가 이해할 수는 없잖은가. 매체의 시장에서는 이렇게 발신자(작가)와 수신자(대중)가 공유하는 코드로 작성한 문장만이 상품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 경우 수신자나 발신자가 그들이 공유하는 그 코드 안에 영원히 갇혀버린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철학이나 예술의 과제는 바로 그 코드 자체를 반성하는 데에 있다.
“요즘은 갤러리랑 안 놀아. 거기서는 4년 전 작품을 요구하거든. 그걸 다 들어주다보면 내 작업을 못 해.” 원래 작가는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코드)로 작품(메시지)을 만든다. 물론 대중은 알지 못한 코드로 작성된 그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은 작품들 속에 구현된 작가의 언어를 이해하게 된다. 물론 대중은 작가가 계속 (자신들이 겨우 이해한) 그 언어로 작업할 것을 요구할 거다.
철학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철학의 과제는 대중이 사용하는 언어로 ‘정보’를 전달하는 작업이 아니라, 대중이 사용하는 그 언어를 ‘반성’하게 하는 데에 있다. 철학의 문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을 통해(through) 전달되는 ‘정보’가 아니라, 그 문장 속에(in) 구현된 새로운 ‘언어’, 그 언어의 낯섦을 통해 촉발되는 새로운 ‘사유’다. 이 낯섦은 소통을 방해한다. 소통할 수 없는 문장은 매체의 시장에서 상품으로서 경쟁력을 가질 수가 없다.
언어의 시장
최근 김어준이 ‘진보 지식인’을 비판했다. 그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실제로 시장에서 ‘진보’는 경쟁력을 잃었다. 한나라당/민주당이라는 이진코드 밖의 문장은 진보(?)언론에서조차도 상품성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반MB 전선에 매몰된 담론이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김규항의 항변은 옳다. 하지만 이 문장은 상품성이 없기에 매체시장의 밖으로 밀려나 좌파들의 수도원 안에서 진짜(?)를 감별하는 기준으로나 쓰일 뿐이다.
‘지식인’도 마찬가지다. 단순한 이진코드로 번역되지 않는 성찰은 대학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날 대학은 경쟁력있는 문장을 만드는 곳이 되었다. 빌렘 플루서는 미래에 인문학은 수도원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중세의 수도원은 악에 물든 세속으로부터 격리되어 신의 신성한 진리를 보존하는 곳. 시장이라는 속세에서 인문학적 성찰을 계속하는 학문공동체들(가령 ‘수유너머’)이 거의 수도원처럼 운영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김어준의 말은 ‘너희들은 경쟁력이 없다’는 시장의 자신감에 흠뻑 젖어 있다. 문제는 시장에서 경쟁력있는 문장은 대중과 공유하는 그 코드에 갇힐 수밖에 없다는 것. 그의 말대로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순간, 대중은 다시 민주당/한나라당의 이진코드에 갇힐 것이다. ‘이성이 감정을 이긴 적이 없다’는 노골적인 반지성주의는 그러잖아도 이성의 결핍으로 고통받는 한국의 대중을 영원히 피/아, 호/오의 이진코드에 가둘 것이다.
피아나 호오의 이진법이 왜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가? 간단하다. 그 복잡한 세상을 단 1bit의 용량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닥치고 정치’, ‘쫄지마 씨바’의 단순한 세계에서는 김연아와 인순이까지 ‘적’으로 분류한다. 한편, 시장의 아비규환을 견디지 못한 (자칭) 좌파들은 저들만의 수도원으로 성스럽게 철수했다. 여전히 세속에 미련이 남은 자들을 ‘전향자’라 비웃음으로써 그들은 자신이 좌파의 선민임을 확인하고 만족해한다.
료타르의 말대로, 디지털 데이터 프로세싱은 철학적, 예술적 성찰과 정말로 호환이 불가능한 것일까? 이진코드로 양극화한 세계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런 글을 쓰는 데에 깊은 회의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