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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커뮤니케이션의 편향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1-12-30

이성과 감성

문명의 역사에 접근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해롤드 이니스의 것이 아닐까? 특이하게도 그는 ‘매체’라는 매개변수를 이용하여 지구 위에 존재했던 문명의 흥망성쇠를 설명하려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모든 매체에는 어떤 편향(bias)이 내재하며, 그 편향을 극복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문명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정말로 매체가 문명의 운명을 결정하는지는 몰라도, 둘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존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돌에서 파피루스로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집트 문명은 시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긴 세월을 이겨내도록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지었고, 심지어 사체마저도 썩어 없어지지 않게 미라로 처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보를 상형문자에 담아 돌에 새겼다. 돌을 매체로 사용하는 문명은 자연스레 시간편향(time bias)을 갖게 된다. 신전이나 무덤, 기념비에 새겨진 정보는 다른 지역으로 운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집트가 제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른 매체가 필요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바로 파피루스다. 종이는 내구성이 없는 대신에 운송이 간편하다. 넓은 지역을 다스리려면 문서를 통한 통치가 필요하다. 파피루스의 발명으로 이집트는 비로소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피루스는 돌이라는 매체와는 달리 반대의 편향, 즉 공간편향(space bias)을 갖는다. 구심력 대 원심력의 관계랄까?

돌에 새겨지는 정보란 대개 국가나 종교에 관한 신성한 내용이나, 파피루스에 새겨지는 정보는 행정이나 경제, 혹은 시민의 일상에 관한 세속적 내용일 수밖에 없다. 주도적 매체의 변화는 곧 사회 자체의 변화를 의미한다. 시간편향을 가진 사회는 보수적이고, 공간편향을 가진 사회는 개방적일 수밖에 없다. 이집트 문명은 이 새로운 원심력(공간편향)을 바로잡아줄 구심력(시간편향)의 부족으로 결국 멸망하고 만다.

흥미롭게도 고대 그리스에서 문자의 도입은 상당히 늦었다. 소크라테스는 글을 쓰지 않았다. 그의 제자 플라톤은 글을 썼지만, 그의 글은 대화체로 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오늘날처럼 문어체로 된 글이 등장한다. ‘말’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가벼운 매체가 아니다. 육중한 기념비만큼이나 발화되는 시간과 장소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구술문화는 시간편향(time bias)을 갖는다.

그리스에서 문자의 도입이 늦은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외려 축복이었다. 그 덕분에 그리스 사회는 모든 시민이 말을 통해 국사를 결정하는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이 빛나는 예술문화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문자의 도입이 늦은 덕분이다. 그리스인들의 신은 신전과 신상, 연극과 서사시와 같은 이미지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처럼 텍스트(경전)로 된 종교는 이미지를 금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말’에 의존하는 한, 그리스는 조그만 도시국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영토를 확장하려면, 무엇보다도 문서 통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세력을 확장하려 했을 때 구술정치에 근거한 직접민주주의는 무너지고, 그리스와 로마는 문서통치에 입각한 제국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로써 고대 문화는 새로이 공간편향(space bias)을 갖게 된다. 이 새로운 편향을 바로잡으려는 과정에서 결국 고대의 제국은 몰락하고 만다.

로마가 기독교를 수용한 것은 이 원심력을 견제할 구심력을 확보화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중세인들은 성서의 신성한 정보를 양피지에 필사했다. 양피지는 내구성이 길고, 그것으로 만들어진 책은 신성한 지식으로 여겨져 수도원의 도서관에 고이 보관되었다. 이로써 중세사회는 자연스레 시간편향을 갖게 된다. 게다가 중세의 유럽은 장원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자립경제의 고립된 공동체 사회가 아니었던가.

유럽인들이 이 시간편향을 극복하려 했을 때 기독교 중세는 몰락하기 시작했다. 근대는 바야흐로 이른바 국민경제를 가진 국민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였다. 이제 공동체들은 상호 고립에서 벗어나 이른바 ‘국경’이라는 것을 이루기까지 공간적으로 확장되어야 했다. 바로 이 시기에 등장하는 것이 마침 중국에서 도입된 종이를 사용한 인쇄술의 등장이다. 그 이후 유럽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이 근대의 인쇄문화 역시 고유의 편향을 갖고 있다. 특히 보수주의자라면 인쇄문화의 공간편향 덕분에 사회적 구심점이 사라졌다고 느낄 것이다(한스 제들마이어가 현대예술을 가리켜 ‘중심의 상실’이라 했던 것을 기억해보라). 해롤드 이니스, 마셜 매클루언, 월터 옹과 같은 캐나다 토론토 학파는 이 구텐베르크의 은하의 편향을 20세기의 새로운 구술문화, 즉 전자문화가 바로잡아줄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새로운 구술문화

매클루언은 구술문화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편향을 직접 민주주의의 요소로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는 TV를 통해 정치인들의 토론을 방 안에서 지켜보다가 전화를 이용해 토론에 참여하지 않는가. 매클루언은 심지어 정보를 사운드로 전달하는 TV와 라디오가 감각의 편향을 바로잡아주기를 기대했다. (말을 듣는) 귀를 (책을 읽는) 눈으로 대체한 문자문화의 시각편향을 전자매체가 교정해준다는 얘기다.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말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과거의 구술문화는 촌락(고대에는 폴리스)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말이 일단 전자매체에 실리면 그것은 거의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고, 그 결과 전 지구적 범위의 촌락공동체가 등장하게 된다. 인터넷은 지구촌의 디지털 버전이다. 이상적인 경우 이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인쇄문화의 ‘이성’과 구술문화의 ‘감성’은 서로 편향을 견제하며 공존할 것이다.

지금 팟캐스트 하나 가지고 사회가 시끄럽다. 그 방송에 열광하는 이들이 진보지식인들의 한계를 지적할 때, 그들은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실제로는 문자매체에 내재된 어떤 편향을 올바로 지적하고 있다. 가령 이성의 과잉, 공감의 결여, 행동의 부족, 소통의 일방성 등. 그 팟캐스트의 성공은 바로 이 편향에서 비롯된 어떤 ‘결핍’의 결과일 것이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편향은 ‘모든’ 매체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제국의 성쇠는 매체의 내재한 편향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무려 600만의 신민을 거느렸다는 이 새로운 제국의 운명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 매체가 문자문화의 편향을 바로잡는 수준을 넘어, 아예 그것을 적으로 돌리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 물론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중세 때에도 민중은 라틴어로 말하는 신부보다 자신들의 언어로 말해주는 아마추어 탁발승을 ‘애정’했기 때문이다.

팟캐스트 자체에 내재된 편향이 본격적으로 드러날 경우, 거기서 또 다른 결핍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 편향을 바로잡기 위해서 또 다른 욕망이 등장할 것이다. 문명과 마찬가지로 매체도 자신의 운명을 갖고 있고, 그 운명은 물론 평소에 자신의 편향을 인지하고 적절히 관리해 나가는 능력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