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의 거리 중에서 광화문이 좋다. 20대의 한 시절, 미래가 불안하니 서로 매일 만나 붙어다니던 여자친구들과 밤늦도록 헤어지질 못하고 서성이던 거리. 세종문화회관 계단이나 분수대 옆 나무의자, 교보문고의 시집코너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양지다방, 시립미술관으로 변한 서울고등학교 운동장이나 미리내 분식점, 무심히 안을 들여다보던 꽃집과 공중전화부스와 83-1번이 서던 버스정류장.
세월과 함께 추억 속으로 아슴하게 밀려나던 광화문 거리를 요즘 다시 자주 찾게 된 것은 광화문에 극장이 생겨서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 같은 멋진 영화를 내가 좋아하는 거리에서 볼 수 있었으니. 지난해 12월에 일 때문에 이광모 감독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가 카드를 한장 주었다. 멋도 모르고 받았는데 자세히 읽어보니 그 카드를 소지한 사람과 동반자 한명이 영화를 무료관람 할 수 있게 돼 있는 카드였다. 선뜻 카드를 받은 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씨네큐브에 영화를 보러 갈 적마다 빈 좌석이 많아서 내심 이러다가 이 극장이 문닫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료라니. 늦게 사양했으나 그는 좋은 분들과 영화를 함께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쁘다는 것이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좋은 분” 속에 내가 속하는지는 의문이었지만 나는 얼결에 씨네큐브의 브이아이피 카드를 소지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카드를 쓸 일은 금방 생겼다. 내집 위층에서 무슨 연유인지 이 한겨울에 대대적인 집 수리 공사에 들어갔는데 집을 수리하는 게 아니라 아마 새로 짓는 모양으로 해머가 벽을 내리치는 소리, 드릴이 벽을 뚫는 소리가 연일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게 아닌가. 장난이 아니었다. 집에 있는 게 아니라 공사장에 앉아 있는 것 같아서 괜히 집에서 나와 이리저리 방황하였다. 그 와중의 어느날 이른 아침엔 광화문으로 나와 <원더풀 라이프>를 보았다. 죽은 사람들. 그 사람들이 영원의 세계로 가기 전에 거쳐가는 림보역. 그곳에서 죽은 사람들은 자기 생애 동안 가장 행복했던 기억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행복했던 순간을 선택하지 못하여 영원의 세계로 가지 못하고 림보역의 면접관이 된 사람들은 죽은 이들이 선택한 행복한 순간을 비디오로 찍어주며 죽은 이는 이후로 다른 모든 생을 망각하고 그 행복했던 추억 하나만을 가지고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지독한 일이다. 한순간을 선택하는 순간 모든 순간이 사라진다니.
뿌연 안개 속을 헤치고 죽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림보역으로 들어선다. 그때껏 살아온 생애 중에서 행복한 순간을 선택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죽은 이들을 바라보는 일은 적막하고 안타까울 뿐 아니라 별로 눈여겨볼 것도 없는 것 같은 타인들의 삶을 반추해보는 도중에 문득 맨발로 눈을 밟을 때처럼 마음이 시렸다. 너는 어느 때 가장 행복했는가. 마치 죽은 이들이 받은 질문처럼 나 자신에게 던지게 되는 질문. 처음엔 슬며시 끼어들던 질문이 내 귓속까지 드릴이 뚫고 들어오는 것 같은 소음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하며 그 질문의 답을 찾는 데 열중하게 만들었다. 행복한 순간이 왜 없었겠는가. 그런데도 이상한 일이지. 자꾸 행복하고는 관련이 없는 일들만 떠올랐다. 기차를 타고 처음 태생지를 떠났을 때, 그리고 몇달 뒤 처음 어머니에게로 돌아갔을 때, 다섯밤 자고 다시 떠나야 했을 때, 잠긴 문을 열었을 때, 내가 당신, 혹은 그들을 배반할 수밖에 없었을 때…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리고… 죽순처럼 끝없이 마음을 뚫고 솟아올랐다가 가라앉는 일들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거나 고통스럽거나 겨우 고요해지는 그런 일들이질 않는가. 하지만 곧 오로지 행복했다거나 오로지 불행하진 않았다는 생각. 인생에는 모든 것이 교묘히 섞여 있다는 생각. 이 순간이 없이 그 순간이 어찌 존재하겠는가. 극장을 나와 광화문 거리를 이리저리 쏘다녔다. 그 옛날 세종문화회관 버스정류장에서 가난하고 추운 모습으로 버스에 올라타던 내 친구의 뒷모습이 어제일인 듯 눈에 밟혔다. 집에 가질 못하고 종내는 그녀를 따라갔었지. 지금 내가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그때와 같은 열정이나 사랑 때문이 아니라 소음 때문이라니. <원더풀 라이프>는 영화를 보는 도중 나는? 반문하며 자신의 매순간을 뒤져보게 한다. 아마도 나는 무엇도 선택하지 못하여 림보역에 남아 있겠지. 어쩌면 그 역은 광화문을 닮아 있을지도. 신경숙/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