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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너의’ 목소리

신의 계시와 이브의 딸(들)

<씨네21>에서 <위대한 계시>가 들어왔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나서 인터넷을 검색해 종로의 개봉관을 찾아갔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가보니 적어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관객이 많았다. 연령대가 지긋한 것을 보니 유럽영화 팬이 아니라 가톨릭 신자들인 모양이다. 영화의 내용은 정확히 이 관객 분포를 반영하는 듯 이렇다 할 재해석 없이 인물의 전기를 충실히 옮겨놓은 한편의 종교영화에 가까웠다.

비전과 열병

힐데그라트 폰 빙엔(1098~1179)은 베네딕트 승단의 수녀로, 신학, 의학, 우주론, 음악, 윤리학 등 다양한 영역의 저서를 남긴 중세 유일의 여성 학자다. 그녀는 독일의 어느 귀족의 가문에서 열 번째 아이로 태어났는데, 부모는 그녀가 8살이 되던 해에 당시의 관행에 따라 그녀를 수도원에 맡기고, 그로부터 몇년 뒤 수녀 서약을 하게 만든다. 이는 십일조의 원칙에 따른 것이라 하나, 그 조치가 가문 정치의 일환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폰 빙엔의 <자서전>(Vita)에 따르면, 그는 3살 때부터 신비한 체험을 하기 시작한다. “나의 생애의 세 번째 해에 나는 내 영혼에 전율을 일으키는 거대한 빛을 보았다.” 이를 그녀는 ‘비전’(visio)이라 불렀는데, 거기에는 늘 열병이 동반되었다. 그녀는 이를 연상의 친구인 유타에게만 알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40대 초반인 1141년의 체험은 그러기에는 너무나 강렬했던 모양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열병이 무병(巫病)을 닮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듣고도 오랫동안 받아 적기를 거부했다. 회의와 불신,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나올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집 때문이 아니라 겸손의 미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신의 채찍이 내게 떨어져 나는 앓아누워, 온갖 병마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가 손에 펜을 쥐고 그것을 받아 적어나갔다. 그랬더니 성스런 문서의 깊은 의미가 느껴지면서, 힘을 얻어 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비지오를 기록한 문서는 당시의 수녀들은 물론이고, 교회와 세속에 속하는 모든 이들의 관심을 끌게 된다. 하긴, 숨은 신의 시대에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고 생각해보라. 신의 영매로서 비지오를 기록하는 폰 빙엔의 작업은 1147년 공의회에서 아예 교황청의 허락을 얻는다. 이 공식적 인정이 부여해준 카리스마를 활용해, 그녀는 중세사회가 여성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다양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중세라는 극단적으로 가부장적인 시대에 폰 빙엔의 존재는 과연 독보적이었다. 중세에 이브의 딸들에게는 신학의 연구가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신의 목소리를 빙자하여(?) 신학의 여러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발표했다. 금기를 깨고 여성으로서 최초로 대중 앞에서 설교를 하는가 하면, 당시 교회와 세속의 유력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여성만의 수도원을 건립한 것으로 보아, 정치력도 대단히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약학에도 재능을 보여, 질병의 원인과 치유를 (오늘날의 뉴에이지 의학처럼) 전체론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만물은 만물과 소통하기에, 인체의 치료에 보석을 사용하기도 했고,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혼의 치료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자신의 요법이 마치 신성한 근원을 가진 것처럼 얘기했으나, 사실 그녀의 약학은 문헌을 통해 얻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의학에 당시의 민간요법을 종합한 것이었다고 한다.

폰 빙엔은 우주론에도 관심을 기울여, 동물과 식물, 천체와 물리의 현상을 설명하기도 했다. 물론 계시를 통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설명은 자연과학이 아니라 자연신학에 가깝다. 예술적 재능도 넘쳐, 종교적 내용을 담은 시와 노래를 지었고, 일련의 종교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중세의 르네상스적 전인, 즉 뛰어난 학자-예술가이자, 자신의 뜻을 관철시킬 줄 아는 정치가, 필요한 후원자를 모을 줄 아는 경영자였던 셈이다.

문제는 이 예외적 재능이 하필 여성의 몸에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여성에게 제한된 역할만을 요구했던 시대에 그녀는 이 넘치는 재능(끼)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비지오’는 세속적 용어로 학문적, 예술적 영감을 의미할 거다. 문제는 그 영감의 표현이 사회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열병은 이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금지된 욕망이 분출구를 찾지 못하면 신경증이나 히스테리로 발전하지 않던가.

성녀냐 마녀냐

비지오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녀의 체험을 기록한 ‘스키비아스’(Scivias)에는 그녀가 계시를 받는 장면을 묘사한 한장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이 로마네스크풍의 세밀화에는 신이 내리는 ‘영감’이 가위로 오린 종이 띠처럼 묘사되어 있다. 폰 빙엔 자신의 말에 따르면, 그가 받는 ‘비지오’는 다섯개의 감각 모두로 전해졌다고 한다. 비지오의 이 공감각적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그녀는 뇌의 시냅스가 남달랐던 모양이다.

이 남다름이 중세에는 상당히 위험할 수 있었다. 중세에 탁월한 여성은 성녀, 아니면 마녀가 되어야 했다. 따라서 자신의 탁월함을 주장하는 것은 제 생명을 50 대 50의 도박에 걸어놓는 것과 같은 모험이었을 거다. 그녀가 오랫동안 자신의 비지오를 기록하기를 거부한 것, 그리고 자신의 비지오가 신성한 근원에서 온 것이라 주장하는 대신에 겸허하게, 조심스럽게 교회에 그 판정을 맡긴 것은 아마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당대에 성인으로 통한 성 베르나르를 통해 자신의 비지오가 신성한 근원을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받게 된다. “내가 이 말을 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것은 나 자신, 혹은 그 밖의 다른 사람의 마음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하늘 높은 곳에서 받은 신의 비밀스러운 신비에서 나온 것이다. 그때 나는 또다시 하늘에서 내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의 목소리를 높이고, 그것을 기록하라.’”

주체와 영매

흥미로운 것은 ‘주체성’의 문제다. 위의 인용문에는 두개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목소리”, 다른 하나는 폰 빙엔 자신의 목소리, 즉 “너의 목소리”다. 신앙을 가진 이들이야 그녀의 목소리가 곧 신의 목소리라 믿겠지만, 신의 존재를 진지하게 믿지 않는 이들은 신의 목소리란 것이 실은 그녀 자신의 목소리라 생각할 것이다. 전자는 이 현상의 신학적 해석이고, 후자는 세속적 해석이다.

여성에게 지적 활동을 허용하지 않던 시대에 여성은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오직 ‘신의 계시’로 포장할 때에만 비로소 사회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었을 거다. 한마디로 이브의 딸들(여성)은 이브의 아버지(신, 혹은 남성 권력)의 부름을 전하는 형식으로만 제 목소리를 낼 수가 있었다. 이는 곧 여성이 ‘사회적’으로 존재하려면 (자신을 주장하는) ‘주체’임을 포기하고 (자신을 비우는) ‘영매’가 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폰 빙엔이 비지오를 거짓으로 꾸며내지는 않았을 거다. 그녀 자신도 제 체험이 신성한 근원을 갖는다고 진지하게 믿었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학적 교리에 지배당하는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그 아래에 깔린 무의식에서 벌어진 일이이라. 사실 폰 빙엔의 사상은 철저히 기독교의 남성주의 도덕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그녀는 최초의 페미니스트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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