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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 그대에게 묻기를
2002-01-16

도정일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러시아 민담에는 ‘소원 성취’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가 많다. 어떤 질투꾼 농부 이야기도 그중의 하나이다. 한 마을에 시기심 많은 농부가 살았는데, 하루는 그에게 신이 나타나 말한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나만 말하라. 내가 이루게 하리라.” 돈벼락? 하루 종일 달려도 끝이 안 보일 넓은 밭과 나귀 100마리? 아니다. 농부는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하느님, 우리 동네 사람들 눈을 하나씩 빼서 모두 애꾸가 되게 해주십시오.” 이 농부에게는 무엇을 얻느냐가 소원이 아니라 남들이 가진 것을 어떻게 박탈하는가가 소원이다. 차르시대 러시아 농사꾼들의 심성을 마비시킨 ‘질투의 문화’를 슬쩍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런 것도 있다. 이번에는 가난한 농사꾼 부부에게 신이 나타나 소원 세 가지를 말하라고 제안한다. 밥짓던 아내가 냉큼 대답한다. “하느님, 소시지 못 먹어본 지가 오랩니다. 소시지가 소원입니다요.” 그 말을 듣고 있던 남편은 불쑥 화가 치민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인데, 저 여편네가 하필 소시지 타령이나 하고 있다니? “겨우 소시지라고? 이 여편네야, 소시지가 그렇게 원이라면 네 코나 소시지같이 길어져라.” 그러자 피노키오의 코처럼, 아내의 코는 기다란 소시지 코로 늘어난다. 화는 화를 촉발한다. 아내도 가만있을 수 없다. “내 코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당신은 무사할 줄 알아? 하느님, 저 인간에게도 소시지 코를 달아주세요.” 그렇게 해서 부부의 코는 평등하게 소시지 길이를 성취했는데, 그들이 그 코를 어떻게 했는지에 관해서는 후속담이 없다. 어떤 이야기에 따르면, 소시지 코를 갖게 된 아내가 “아이고, 하느님, 내 코를 원래대로 돌려놓아 주십시오”라 빌고, 세 가지 소원 말하기는 결국 부부의 코 싸움으로 끝났다고 한다.

대학 입시 면접에는 이른바 ‘인성 테스트’라는 것이 있다. 몇분간의 짧은 문답으로 어떻게 인성을 테스트한다는 것인지 나로선 알 길이 없으나, 그 불가능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나는 대학쪽이 준비해준 예시 문항들과는 관계없는 러시아 민담식 질문들을 가끔 던질 때가 있다. “자네가 도깨비 방망이를 가졌다 치자. 그걸로 자네의 소망 세개를 이룰 수 있다. 무엇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가족이 모두 건강했으면, 대학에 재깍 붙었으면, 할머니 다리가 펴졌으면…. 이런 답변들이 나온다. 소망 두 가지까지 말해놓고, 나머지 하나는 “비밀로 하고 싶다”는 여학생도 있다. “도깨비 방망이가 뭡니까?”라는 역질문도 나온다.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금비까비 은비까비 얘기 같은 거 들은 적 없어요?” “없는디요.” “외국서 살다 왔나요?” “아뇨, 토종입니다.” 이 토종은 교과서 참고서만 열심히 공부한 ‘범생이’ 부족의 일원이었던 모양이다.

“악마가 와서 귀하의 모든 단점을 한번에 없애주겠노라 한다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이런 질문도 나는 던진다. “거부하겠다”는 대답이 많다. “왜 거부하는가?” 한 여학생의 답변. “단점이 없어지면 제가 생각할 거리도 없어질 것 같아서요.” ‘악마’라는 말이 더러 맘에 걸린 것일까? 이번에는 ‘천사’를 등장시켜 보기로 한다. “천사가 나타나 아무개야, 인간으로서 네가 천사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느냐? 말해보라, 란다면 귀하는 무얼 자랑하겠는가?” 물론 이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에 나오는 한 구절에서 따온 질문이다. “저는 정기적으로 헌혈을 합니다”는 대답도 나오고, “남을 잘 배려한다”는 답변도 있다. “어떻게?”라고 물으면 “지하철에서 친구가 피곤해할 때 자리를 양보한다”고 어떤 입시생은 말한다.

‘소망’을 세워보는 것은 신년 벽두 우리네 가슴의 은밀한 행사이기도 하다. 2002년 나의, 당신의, 우리의 세 가지 혹은 한 가지 소망은? 천사가 신년 초두의 한국인에게 와서 “코리언이여, 당신이 인간으로서 자랑할 만한 것이 있는가? 말해보라”고 주문한다면? 개인의 꿈이 있듯 모두가 함께 꾸는 집단의 꿈도 있다. 시민단체 ‘참여연대’의 구호 중에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됩니다”라는 것이 있다. 좋은 문구다. 개인으로서의 나의 꿈과 집단으로서의 우리의 꿈이 모두 천사 앞에 정정당당하게 내놓고 ‘자랑할 만한 것’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꼬. 공개하라면 이것이 나의 세 가지 신년 소망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두개는? 나도 앞서의 여학생처럼, 그러나 한술 더 떠서, “그 두 가지는 비밀”이다.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문학평론가 jidoh@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