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세장의 사진이 있다. 이 사진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는다. 첫째, 1980년대 초반 서울 강북 지역을 촬영한 것이다. 둘째, 당시 건축과 사진을 막 배우기 시작했던 내가 찍었다. 셋째, 이 사진에 등장하는 건물들, 즉 안암동 일대의 한옥과 혜화동 언덕길의 계단, 그리고 대학로의 벽돌 건물은 이제 모두 사라지고 없다. 물리적 실체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나 그 이미지를 담은 사진은 남았다.
필멸하는 존재인 인간이 불멸을 꿈꿀 때 하는 것 중 하나가 건축이다. 나만 해도 누군가를 만나 건축가라고 하면 대부분 “좋으시겠어요. 남으니까요”라고 이야기한다. 자기의 흔적이 남는 것이 정말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과연 건축이 실제로 오래가기는 할까? 간단히 말하자면 건축의 물리적인 수명 자체는 엄청나게 길다. 수천년에 이르는 역사를 가진 건축물이 지구상에 아주 많다. 물론 그중 상당수가 유적이지만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으로 파괴되지 않고 사람의 손길이 계속 미쳤더라면 상태가 훨씬 더 좋을 것이다. 목조건축 위주인 우리나라에도 수백년 정도의 세월쯤은 거뜬히 이겨낸 건축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축은 삶이 그리 길지 못하다. 특히 고도성장기를 겪은 대한민국에서 더욱 그렇다. 건축의 운명은 결국 물리적 수명보다는 사회적 수명에 의해 결정된다. 재개발, 재건축을 위한 안전진단에서 자기가 살아온 곳이 알고 보니 아주 위험했다는 판정을 받고서 오히려 기뻐하는 기현상도 그 한 부분이다. 이런 세상에서 건축가는 참 난처하다. 지금 내가 설계하는 이 건물이 과연 이 세상에서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것인지 여러 번 자문하게 된다. 하지만 그 질문에 아무도 답을 줄 수는 없다.
결국 최선을 다해 설계하고 지으면 사람들이 아끼고 사랑할 것이라는 믿음 하나로 건축가는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것이 바로 사진이나 동영상이다. ‘이미지는 찰나적이고 덧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건축가는 속으로 이렇게 다짐한다. “언젠가 내 건물은 사라질지 모르지만 영상은 남을 것이다. 건축은 유한하고 이미지는 영원하다”라고. 오래된 사진과 영화를 통해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건축과 도시의 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영속성의 역설을 새삼스레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