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앙코르 와트와 같은 문명은 오늘날의 눈에는 기이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사원이 지어질 당시만 해도 그 지역은 인구 100만명이 넘는 번화한 지역. 당시 영국의 런던은 인구 5만명 남짓의 작은 마을이었다. 그렇게 발달한 문명이 그렇게 갑자기 정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왜 그들은 삼림을 파괴하고 국력을 소진해가면서까지 그토록 거대한 역사에 매달려야 했을까?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신이 존재하기에 신의 모상을 만든 게 아니라, 신의 모상을 만듦으로써 신을 존재하게 했다”. 교활한(?) 책략이다. 모상은 항상 어떤 것의 모상. 모상이 존재한다면, 원상 또한 존재해야 한다. 가령 실존하지 않는 인물의 신분증을 위조해 길거리에 흘린다면, 그것을 주워든 사람은 신분증 안의 인물이 실존한다고 믿을 거다. 원본 없는 복제가 원본을 대신하는 시뮬라시옹 현상은 이렇게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형상금지
그리스인들은 신들의 집을 지음으로써 올림포스의 신들을 존재하게 했다. 중앙의 신상에서 주랑을 통해 흘러나오는 신성한 분위기. 올림포스의 신들은 이 ‘느낌’ 속에서 실존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 신의 숨결 속에 들어 있다는 느낌, 그리하여 그 존재가 지금 내 곁에 계신다는 느낌. 그것을 ‘아우라’라고 부른다. 시엠립에 앙코르 와트와 바이욘 사원을 지은 이들도 분명히 이 종교적 매트릭스의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신전을 짓는다는 것은 달랑 건물을 하나 세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 올림포스의 신들을 빼면 그리스 문명에서 무엇이 남겠는가? 가령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한 것은 그로써 한 역사적 민족의 삶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캄보디아인들이 앙코르 와트를 세웠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세계를 프로그래밍한 것이다. 그 사원들이 정글에 먹혀버렸을 때 가장 위대했던 민족의 세계도 사라진 것이다.
‘신전’은 신의 거처, 즉 신상을 모시는 곳이다. 물론 유대교나 기독교에서는 신의 집에서 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유대의 신은 인간들에게 제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유대교나 기독교의 신전은 신자들이 모이는 ‘회당’에 가깝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로마인들은 성전을 지을 때 성(聖)에 속하는 신전이 아니라 속(俗)의 건물인 공회당을 모델로 삼아야 했다. 유럽의 성당이 ‘바실리카’라 불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여러 문명의 신상을 보며 고작 ‘우상’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유대교를 통해 기독교로 전해져 내려온 형상금지(iconoclasm)의 편견 때문이리라. 이슬람은 형상금지의 계율을 더 극단적으로 추구한다. 기독교의 성당에서는 벽화나 동상이라도 볼 수 있지만, 이슬람 사원에서 구체적 대상을 묘사한 형상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사원의 장식에는 ‘아라베스크’라는 이름의 추상적 문양이 사용될 뿐이다.
미술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가령 추상회화로 나아가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야수파의 화가들은 아프리카의 조각과 더불어 이슬람의 아라베스크 문양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검은 사각형’을 두 벽이 만나는 모서리에 걸어놓았는데, 그곳은 전통적으로 정교회에서 성상을 걸어놓는 곳이었다. “성상(icon)의 자리에 성상 파괴(iconoclasm)의 아이콘(icon)을 걸어놓은 셈”이다.
이미지의 위기
기독교와 유대교의 형상금지는 아마도 문자의 도입으로 이미지가 의심받던 상황의 산물일 것이다. 하지만 문자를 모르는 민중들에게 이미지 없는 종교를 믿으라 권하는 것은, 매트릭스의 주민들에게 문자와 숫자로 된 프로그래밍을 믿으라고 권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 때문에 기독교는 자기가 정한 계율을 스스로 어길 수밖에 없었다. 중세의 교회가 예수와 성자와 성모를 모사한 온갖 성상으로 뒤범벅되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형상금지의 계율이 아우라를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왜 유대인은 신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했을까? 문화적 상대주의 때문이었을 거다. 민족간의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민족마다 절대자의 모습을 다르게 형상화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을 이 문화적 상대성에서 구하여 그에게 절대성을 부여하려면 당연히 구체적 형상을 포기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형상금지는 외려 더 큰 아우라를 연출하기 위한 장치라 할 수 있다.
구상을 포기한다고 아우라가 사라지겠는가? 신상은 없어도 유대교에도 성소는 존재한다. 사실 추상 계열의 작품일수록 아우라로 무장하곤 한다. 가령 칸딘스키와 말레비치는 자신들의 절대추상에 우주론적 규모의 거창한 이론을 덧붙였고, 바넷 뉴먼과 마르크 로스코는 자신들의 색면추상이 일으키는 효과를 숭고의 체험으로 묘사하곤 했다. 추상이든 구상이든 모든 이미지에는 아우라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아우라의 파괴
발터 베냐민은 제의의 대상이 오늘날 전시의 대상으로 전락한 데에서 아우라 파괴의 시작을 본다. 물론 그로써 아우라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성상에 대한 종교적 숭배가 이제 작품에 대한 예술적 숭배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렇게 신은 없는데 신학(아우라)은 존재하는 현상을 그는 ‘부정신학’이라 불렀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그는 사진이나 영화와 같은 복제매체가 이 예술적 아우라마저 파괴한다고 보았다.
가령 앙코르 와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반테이 스레이라는 이름의 힌두교 사원이 있다. 힌두의 신들을 존재하게 했던 그 사원에서 예전처럼 종교적 아우라를 체험할 수는 없으리라. 우리의 눈에 신전은 그저 ‘작품’으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정교한 건축과 조각으로 이루어진 이 완벽한 작품(?) 앞에서 우리는 거의 종교적 외경에 가까운 예술적 경외를 느끼게 된다. 이것이 베냐민이 말한 ‘부정신학’의 상태이리라.
베냐민은 아우라의 파괴를 ‘진보적’ 현상으로 보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한때 박물관이나 미술관 속으로 들어와 한갓 작품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한탄한다. 우리가 신상을 한갓 ‘작품’으로 감상할 때 한때 그것들이 각 민족에게 열어주었던 ‘세계’는 붕괴하고 만다. 하이데거는 현대인들에게 신상들이 아우라와 함께 열어주었던 그 진리(wahrheit)를 보존(bewahren)할 것을 요청한다.
베냐민의 시대에 아우라를 파괴하는 것이 대량으로 복제된 이미지였다면, 오늘날 아우라를 파괴하는 것은 복제여행일 것이다. 상품화한 여행을 통해 모든 이가 여행을 하게 된 것은 진보적 현상일지 모르나, 사원을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은 종교적 아우라는 물론이고 예술적 아우라를 느끼는 데에도 별 관심이 없다. ‘지금, 여기’의 아우라를 체험하기보다는 (사진으로) ‘그때 거기’에 있었노라는 증거를 남기기에 바쁠 뿐이다.
한갓 관광의 ‘자원’으로 전락해버린 사원의 경내에 그래도 사원 본연의 제의적 기능을 되살리려 애쓰는 기특한 이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그들은 내게 향불을 공손히 건네주며 사원에 남겨진 불상 앞에 절을 하라고 권했다. 고대의 사원에서 신의 입김을 느껴보는 이 후각적 아우라의 연출을 하는 데에는 물론 향불 하나에 1달러씩 요금을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