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혀 바쁘지 않아요. (김영진 PD를 가리키며) 이분들이 다 만들었다니까.” 자신의 공연팀 ‘꿍따리 유랑단’과 함께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삼육재활원에서 막 공연을 마치고 인터뷰 장소에 도착한 가수 강원래(사진 오른쪽)가 말한다. 옆에 있던 KBS 김영진 PD는 “허허” 웃으면서 “지금은 안 바빠요. (홍보사 직원을 가리키며) 홍보하시는 분들이 수고가 많지요”라고 홍보사 직원에게 공을 돌린다. 덕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훈훈한 풍경을 보니 두 사람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기는 사람인 것 같다. 다큐멘터리 <꿍따리 유랑단>은 지난해 KBS1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방영된 드라마 <고마워 웃게 해줘서>의 제작기다. 이 드라마는 강원래가 이끌고 있는 장애인 공연팀 ‘꿍따리 유랑단’의 실화를 극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실제 ‘꿍따리 유랑단’팀이 참여해 자신의 캐릭터를 직접 연기했다. “드라마를 만들면서 제작기를 남겨놓으면 의미가 있을 것 같아 <꿍따리 유랑단>도 함께 제작하게 됐다”는 강원래, 김영진 PD를 만나 제작기를 들었다.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 강원래_세브란스 병원 재활병동 동기다. 형님(김영진 PD)은 미국에서 사고를 당하셨고. 병원에 연예인이 오면 간호사들이 수군거린다. 한번은 아내가 그러더라. ‘오빠, 채시라와 무슨 관계야? 채시라가 병원에 왔다던데?’ (웃음) 왜 왔을까 궁금했다. 병원에 나 말고 연예인이 없는 것 같은데…. 또 한번은 탤런트 정애리씨가 병원 밖에서 울고 있더라. ‘어쩐 일로 병원에 왔어요?’ 라고 묻기도 그렇고. 알고 보니 배우들이 감독님 병문안 온 거였다. 그때부터 탤런트가 오면 감독님 손님, 가수가 오면 내 손님이고. 한동안 병원이 시끌벅적거렸다.
-KBS1 크리스마스 특집 드라마 <고마워 웃게 해줘서>를 만든 계기가 뭔가. 강원래_퇴원한 뒤 KBS에서 만났다. 형님은 형님대로 PD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꿍따리 유랑단 공연과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었다. 가끔 스튜디오에 들러 ‘나 걷는다’라고 자랑하고 가시고. (웃음) 형님은 나보다 더 심각한 사고였다. 꿍따리 유랑단을 시작한 이유가 있다. 보호감찰소에서 아이들에게 ‘오토바이 타지 말라’는 내용의 강연을 많이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말이 안되더라. 나도 탔잖아. 차라리 공연이라는 형식을 통해 아이들에게 편하게 다가가자 싶었다. 한창 꿍따리 유랑단 공연을 하던 중 <워낭소리>를 봤다. 우리도 저런 이야기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감독님을 찾아갔다. 김영진_한국에서 장애를 묘사한다고 하면 다들 극복, 인간승리를 그리고 싶어한다. 사실 100만명의 장애인이 있다면 장애를 극복하는 사람은 1명 있을까 말까다. 꿍따리 유랑단 공연을 처음 봤을 때 좋았던 건 ‘극복’이 아닌 ‘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를 주었다는 것이다. 강원래_공연 보고 울더라. 우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웃음) 장애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극복’이다. 장애 판정을 받으면 재활병동에서 ‘부정-분노-좌절-수용’ 네 단계를 배운다. 환자들은 처음에 ‘내가 왜 장애인이야’라고 현실을 부정한다. 장애를 인정하면서부터 분노가 생긴다. 그리고 ‘이렇게 살 거면 죽어버리자’라고 좌절한다. 그 다음이 수용인데, 우리나라의 재활 관련 서적들은 ‘수용’이 아닌 ‘극복’으로 표기한다. 사실 극복이라는 건 ‘나쁘다’라는 의미를 내재하고 있지 않나. 가령, 못생긴 사람에게 ‘넌 극복할 수 있을 거야’라고 얘기하는 건 ‘외모가 나쁘다’는 의미잖아. 다큐멘터리를 통해 ‘너희들은 극복했어’가 아닌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보자’라는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랜만에 나간 현장은 어땠나. KBS 드라마 <야망의 전설>(최수종, 채시라, 유동근 출연) 찍을 때가 생각났겠다. 김영진_아주 날아다녔다. 오랜만에 현장에 나가니 기분도 좋았고. (웃음) 예전에는 하루 동안 정말 많이 찍었다. 촬영이 끝난 뒤 편집실에서 촬영분을 확인하면 ‘이 장면은 언제 찍었어?’라며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드라마에는 꿍따리 유랑단 같은 비전문배우와 손현주, 정애리, 송재호 등 베테랑 배우가 함께 출연한다. 김영진_꿍따리 유랑단 친구들에게는 연기를 하지 말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라고 주문했다. 비전문배우들에게 그 말이 귀에 제대로 들리겠나. 자꾸 뭔가를 하려고 했다. 손현주, 정애리, 송재호, 김규철, 권해효 등 개런티를 거의 받지 않고 도와준 배우들에게 감사하다. 강원래_캐스팅과 관련해 감독님과 의견대립이 있었다. 나는 주인공 역할만큼은 전문배우가 맡아서 멋지게 보여주길 원했다. 반면 감독님은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리길 원했고.
-다큐멘터리의 후반부, 한 단원이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노출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감독님께서 장애라는 설정을 리얼하게 표현하기 위해 옷을 벗으라고 했다’고 불만을 터트린다. 강원래_꿍따리 유랑단 연습과정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재식이라는 친구가 한쪽 팔이 없다. 박수를 치라고 하면 박수를 안 친다. ‘팔이 없어도 어깨와 손을 맞부딪히면 되잖아’라는 말에 재식이는 ‘어떻게 그렇게 해요’라고 대답하더라. 아무렇지 않게 박수를 치면 그냥 지나갈 일을 장애를 자꾸 숨기니까 사람들은 장애를 깊게 파고든다. ‘저 사람은 결혼을 어떻게 할까’, ‘아이를 낳을 때 한쪽 팔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쉽지 않겠지만 결국 장애는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영진_카메라가 (한쪽 팔이 없는) 오른쪽에 있었다. 장애가 카메라에 담기는 게 관객에게 반응이 좋다. 주인공을 맡은 지혜씨가 휠체어에서 넘어지는 장면을 찍을 때 카메라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더라. 그게 일반인이 장애인에 대해 가지는 안타까운 시선이다. 지혜씨가 넘어지더라도 멈칫거리지 말고 모두 담으라고 촬영감독에게 주문한 것도 그런 시선을 뒤집기 위해서다.
-‘나, 장애인 아니야’라고 아직도 자신의 장애를 부정하는 김영진 감독과 달리 강원래씨는 장애를 인정하는 점에서 굉장히 쿨한 것 같다. 그걸 다른 장애인에게 얘기할 때 어떤 점에서 냉정하게 보이기도 하더라. 강원래_장애인으로 구성된 꿍따리 유랑단의 리더잖아. 내가 조금만 삐끗거려도 유랑단이 확 무너지기 때문이다. 클론으로 댄스팀을 이끌 때도 그랬다. 좀 힘들더라도 스스로 분위기를 많이 잡는 편이다.
-다음 작품은 뭔가. 김영진_크리스마스 특집 8부작 방송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새터민의 삶을 그리는 작품이다.
-한 인터뷰에서 꿍따리 유랑단이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강원래_뮤지컬을 준비하고 있다. 뮤지컬 <빨래>에 출연한 배우들이 단체로 나와 <서울살이 몇핸가요>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당신의 촉촉한 마음, 깨끗하게 빨래 해줄게요’라는 가사를 가장 좋아한다. 그걸 보면서 우리 단원들이 하면 얼마나 멋질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래>의 추민주 작가를 만나 뮤지컬을 써달라고 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대본이 나오면 무대에 올릴 생각이다. 물론 공연도 계속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