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11월2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마지노선이 무너지고 한-미 FTA 발효가 눈앞에 다가오면서 산업별로 득실을 따져보는 전망이 줄을 잇고 있다. 그렇다면 한-미 FTA는 한국의 영화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존망이 점쳐지는 여타 산업과 얼핏 비교하면 당장 큰 타격을 입지 않을 것 같다. 영화계는 이미 한-미 FTA 협상 테이블이 마련되기도 전인 2006년 초, 스크린쿼터 73일을 강탈당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11월 초에 한-미 FTA 비준을 확신하듯 “종합유선방송·위성방송·방송채널 사업의 경우 국산 프로그램 의무편성비율을 영화 20%, 애니메이션 30% 등 각각 5%씩 줄인다”는 내용의 고시를 냈지만 애니메이션 업계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한-미 FTA 발효 뒤 3년이 지나면 외국인에 대한 간접투자비율이 100%까지 허용되어 미국의 거대 방송사업자들이 한국에 상륙한다는데 이 역시 국내시장 크기를 감안할 때 뭐라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위험이 더 큰 화를 부르는 법이다. 한-미 FTA의 대표적인 독소조항 중 하나가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이다. 서비스 분야에 포함되어 있는 문화산업이 가장 유념해야 할 독소조항이다.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은 한-미 FTA 협정문 부속서에 명시한 일정 분야를 제외하고 모두 개방해야 한다. 개방 분야를 부속서에 규정하는 포지티브 리스트 방식과 정반대다. 기존의 협정들이 ‘포지티브’를 따랐던 것과 달리 한-미 FTA는 미국의 요구대로 ‘네거티브’를 택했다. 문제는 한-미 FTA 서비스 분야 협정 부속서에 명시된 것이 토막난 ‘스크린쿼터 73일’이 전부라는 점이다. 그나마 남은 73일이라도 보장받을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네거티브 리스트 방식이 독소조항인 것은 미래에 규정하지 않은 새로운 분야가 등장할 경우에도 자동적으로 개방 대상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디지털·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영화라는 콘텐츠는 이미 극장을 벗어나 휴대폰, 태블릿PC 등에 탑재되고, 향후에는 어떤 경천동지할 신매체가 등장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11월21일 문화연대가 주최한 ‘한-미 FTA를 반대하는 문화예술언론인 기자회견’은 독소조항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를 강행처리하려는 무지한 정부에 대한 준엄한 경고의 자리였다. 이날 모인 영화인들은 앞으로 “영상, 출판은 물론 순수예술 분야까지, 디지털로 전송 배포되며 이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개방대상이 되는) 전자상거래로 분류된다”면서 한-미 FTA 발효 시 자국 콘텐츠를 위한 최소한의 보호장치마저 만들 수 없게 된다고 비난했다.
지난해 정부는 EU가 제시한 선결 조건 때문에 FTA 체결에 앞서 문화다양성협약을 받아들였다. 문화다양성협약의 20조 1항은 해당 협약을 다른 어떤 조약에도 종속시키지 말 것이며, 다른 조약들을 적용할 때 문화다양성협약의 관련 규정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현 정부의 한-미 FTA 날치기 처리는 앞서 맺은 국제적 약속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행위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양기환 이사장은 “독단적으로 무장해제를 선언한 대통령이 사후대책 운운해봤자 과연 실현 가능한 대책이 나오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제까지의 절망보다 앞으로의 절망이 더 클 것이라는 비관이 충무로를 짓누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