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국 감독은 하마터면 배우로 남을 뻔했다. 단역이긴 하지만 그는 지난해 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반면 그가 그토록 원했던 연출 기회는 쉽사리 주어지지 않았다. 현장에 대한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단역도 마다하지 않았고 심지어 대학원에 진학해 6편의 단편을 찍었다는 황병국 감독. 두 번째 장편영화 <특수본>을 들고 6년 만에 돌아온 그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간의 마음고생까지 털어놨다.
-시사회 직후 동료들의 반응이 어떤가. 혹시 김성수 감독도 봤나(황병국 감독은 데뷔하기 전 김성수 감독의 연출부였다). =VIP 시사회가 기자 시사 다음주라 많이들 못 보셨다. 김성수 감독님은 음악 넣기 전에 보여드린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분 스타일 알잖나. 바꿀 수 없는 상황이면 항상 좋은 이야기만 하신다. 봉고차 액션은 다른 영화에선 못 본 장면이라 칭찬을 하시긴 했다. 그 장면은 촬영 전에 프리 비주얼 작업까지 했는데 막상 찍으려고 하니 긴장이 되더라. 그때도 감독님은 내게 액션은 눈속임이 아니라 감정이 우선이라고 조언해주셨다.
-장편 데뷔작 <나의 결혼원정기>(2005)를 기억한다면 <특수본>은 좀 의외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관객이 있을 것 같다. 전부터 범죄액션물에 대한 관심이 있었나. =원래 영화는 안 가리고 다 본다. 영화를 관객과 치는 포커라고 한다면, <특수본>은 빨리 치는 포커라고 해야 할까.
-데뷔작 개봉 뒤 6년이 흘렀다. 그동안 준비했던 프로젝트가 꽤 있었을 텐데. =<나의 결혼원정기> 개봉 직전에 일본에서 연출 제의를 받은 적 있다. 김승우씨가 출연했던 <컬링 러브>라는 작품이다. 받은 시나리오를 고칠 시간을 좀 달라고 했는데 그쪽에서는 겨울이 끝나면 컬링장이 테니스장으로 바뀐다면서 무조건 겨울이 끝나기 전에 촬영에 들어가야 한다고 못박아서 무산됐다. 2006년에는 튜브픽처스에서 아사다 지로의 소설 <천국까지 100마일>을 영화화하려고 준비했지만 회사가 어려워져서 결국 접었고, 그 뒤로 옐로우필름에서 한재덕 프로듀서가 준 아이템으로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때도 회사가 영화 사업을 정리하는 바람에 어렵게 됐다.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에 입학한 건 그 뒤인가. =두편 연달아 엎어지니까 머릿속이 어지럽더라. 그래서 대학원에 간 거다. 어딘가에 소속되면 그래도 상실감이 좀 덜어질까 싶었다. 다른 반경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아이템도 좀 나올 것 같고. 동기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처음엔 서먹서먹했는데 그거 없애려고 수업은 물론 술자리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사이 <해결사> <부당거래> <의뢰인> 등에 단역으로 출연했는데. =박정범(<무산일기>) 감독의 단편 <125 전승철>이 시작이었다. 박 감독이 나랑 대학원 동기다. 하루는 자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를 해서 출연 좀 해달라고 하더라. 브래지어 공장 공장장 역할인데 연기할 사람이 없다면서. 어디냐고 했더니 부천이라고 해서 내려갔다. 대사도 따로 없고 시추에이션에 맞춰서 애드리브로 다 했다. <125 전승철>이 다음해에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수상했는데 그때 심사위원이 류승완 감독님이었다. 그래서 류 감독님이 연출한 모토로라 광고영화 <타임리스>에 감독 역으로 출연했고, 그 인연이 쭉 이어진 거지.
-배우 경험이 연출에 도움이 됐나. =나를 잊지 말아달라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지. (웃음) 나 때문이든 상대 때문이든 영화를 6년 동안 못 찍었으니 현장에 대한 목마름이 있지 않았겠나. 그래도 몇번 출연하다 보니 아직 황병국이 충무로에 있구나 하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줄 수 있어서 좋더라. 결혼식이나 상갓집에 가도 다들 영화 잘 봤다면서 한마디씩 해주니까. 출연 안 했으면 ‘어, 어’ 하고 말았겠지.
-<특수본>은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작품이 아니다. =초고를 김유진 작가가 썼다. 여성이 썼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시나리오를 보고 제작자(영화사 수박 신범수 대표)는 아마 <의뢰인> 같은 고급스럽고 세련된 할리우드 스타일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스타일은 뚝배기에 더 가깝잖나. 사건보다 인물들의 감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내 식대로 가도 되겠냐고 했더니 그러라고 하더라.
-이전 인터뷰에서 “영등포스러운” 버디무비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김성범(엄태웅)과 짝을 이루는 범죄분석관 캐릭터는 좀 튀어 보인다. =시나리오가 사건 위주로 짜여져 있었는데 그걸 다 고칠 순 없었다. 애초 이 영화의 기획 방향대로 찍으려면 사건이 더 필요한데 그걸 만들어 넣을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고. 내 입장에선 김성범이 사건에 뛰어들게 되는 상황을 좀더 설득력있게 만들어주는 에피소드와 감정을 추가하는 정도에서 마무리하고 촬영에 들어가야 했다.
-보도자료는 김성범을 ‘한번 물면 절대 놓치지 않는’ 성격의 열혈 형사로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설명하면 흔히 <공공의 적>의 강철중을 연상하게 되는데, 막상 영화를 보면 김성범은 여린 성격의 인물이다. =영웅처럼 제시되는 캐릭터는 다른 영화에서 많이 나오지 않았나. 김성범을 영웅보다 소시민처럼 그리고 싶었다. 어리바리한 형사가 점점 사건의 중심에 빠져들게 되고, 어떤 계기로 악과 싸우게 되는 식으로. 왜 극중에서 처음에는 적을 무서워하다가 마지막에는 힘을 모아서 딱 무너뜨리는 시장 상인들이 나오잖나. 김성범이 그런 시장 상인들과 닮았으면 했다.
-여자 형사의 가슴을 훔쳐보는 첫 장면이 김성범의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찌질한 거지. 봤네, 안 봤네 승강이하고. 장르 규칙을 따르자면, 경찰이 죽는 장면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 하지만 경찰들의 일상과 또 김성범의 캐릭터를 짧은 컷으로나마 보여주며 시작하고 싶었다.
-버디무비로서의 재미는 기대보다 덜하다. =(엄)태웅씨와 주원의 나이 차이가 12살이다. 반 농담으로 태웅씨는 3살 줄이고, 주원은 3살 올리고 뭐 그러긴 했는데. 나이 차이가 나니까 <살인의 추억>의 송강호와 김상경 같은 티격태격하는 그림은 잘 안 나오더라. 사실 내가 연출하겠다고 하기 전에 배우들이 캐스팅된 상태였는데, 내 생각에선 무리하게 캐릭터에 배우를 맞추는 것보다 배우에 맞게 캐릭터를 조정하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 태웅씨는 TV단막극 <제주도 푸른 밤>을 봤을 때 억누르고 참는 눈빛이 좋아서 사실 감정을 내지르는 대사들도 눌러달라고 부탁했다. 아, 그리고 건달로 나오는 이희준이라는 친구도 비슷한 경우다. 건달 느낌이 안 나서 연기하기 전에 뭐했냐고 했더니 공대 나와서 회사 다녔다고 하더라. 주변에 건달 친구 하나 없다고 하고. 그래도 극단 차이무 출신이라 영화에선 안 보여줬던 느낌들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봤고, 차라리 정통 건달 말고 잘할 수 있는 건달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의 것이 나온 거지. 어수룩한 깡패도 있는 것 아닌가. 부천에 가면 그런 건달들 있다. (웃음)
-반면, 김정태, 성동일 두 배우에게선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다. 낯익은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관객이 예상치 못했던 등장이다.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관객의 기대와는 반대로 끌고 가보고 싶었다. <나의 결혼원정기>에서 (유)준상씨도 그랬고. (김)정태씨나 (성)동일 형 같은 경우는 관객이 기대하는 1번 캐릭터보다 내가 아는 2번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더라.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게 만드는 설정이나 장치들이 있다. =애초 시나리오가 최근 나온 다른 영화들처럼 무겁고 드라이했다. 관객으로서는 그런 영화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 영화들을 보러 가면 여성 관객은 그런 대목에서 대부분 눈을 가리고 본다. 또한 애초에 15세 관람가로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있었고, 그게 내 입장에선 강박이었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받은 뒤 처음엔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가중하는 데 신경을 썼지만 나중엔 등급을 고려해서 유머러스한 상황들을 늘렸다.
-골목, 주차장, 봉고차 등 공간을 활용한 액션 장면들이 눈에 띈다. =스탭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제작비가 26억원인데 49회를 찍었다. 35억원에 65회는 찍어야 그림이 제대로 나올 것 같았는데. 어쨌든 예산이 빡빡하다 보니 이미 그림이 만들어져 있는 로케이션 장소를 찾아야 했다.
-액션 장면들의 컨셉은 어떻게 잡았나. =윤일도와 박경식(김정태)의 칼싸움은 <쓰바키 산주로> 같은 사무라이영화처럼 하나의 합으로 끝냈으면 했고, 지게차 액션은 박경식을 괴물처럼 보이게 만들고 싶었다. 봉고차 액션은, 미식축구 할 때 공 하나 가지고 사람들이 얽히는 그런 모양새였으면 했고.
-대형 비리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 후반부는 굉장히 빠르게 진행되는데다 직설적이다. =공권력을 사적으로 남용하는 이들 때문에 결국 피해를 보는 건 우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 법정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그 작품 역시 사회적 이슈를 결합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