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씨. 저도 서연씨 처지 이해해요. =네? 기자님이 제 처지를 어떻게 이해하신다는 거죠?
-저도 요즘 정신이 깜빡깜빡하거든요. 어젯밤엔 가스 밸브를 잠갔는지 안 잠갔는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나서 잠자리에 누웠다가 일어나서 가스 밸브를 확인했어요. 그런데 또 잠깐 잠들었다가 또 가스 밸브를 잠갔는지 안 잠갔는지 헷갈려서 다시 한번 밸브를 확인하고…. =그런 건 제가 앓는 병과는 별로 관계없을 겁니다. 오히려 주의력결핍장애와 가까운 거겠죠. 저는 알츠하이머예요. 치매라고요.
-하,하지만.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라고요. 오늘 아침엔 금방 샴푸로 머리를 감아놓고는 내가 머리를 감았는지 안 감았는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샴푸를 두번이나 했지 뭡니까. 문제는 이런 일이 일주일에 두세번은 발생한다는 거예요. 덕분에 머릿결은 푸석푸석해지고…. =그 정도로는 알츠하이머라고 할 수 없죠. 기자님은 그냥 정신이 좀 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저처럼 고유명사가 점점 머릿속에서 사라져가는 괴로움은 겪으신 적 없잖아요.
-아뇨. 고유명사도 점점 생각이 안 납니다. 요즘은 인터넷 없이는 기사를 쓸 수가 없어요. 얼마 전엔 <드라이브> 기사를 쓰다가 라이언 고슬링이란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라이언 레이놀스, 라이언 필립, 라이언 킹… 라이언으로 시작되는 다른 이름만 계속 머릿속에서 빙빙 돌아가더라고요. 특정 영화제목이 기억 안 난지는 정말 오래됐어요. 사실 이런 ‘특정 영화제목과 배우 이름 알츠하이머’는 <씨네21> 기자들이 공통적으로 앓고 있는 정신병의 일종이기도 합니다만. =뭐 그러시겠죠. 하여간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를 하기엔 제 시간이 지나치게 소중합니다. 제가 얼마나 할 일이 많은 줄 아십니까. 매일매일 정상적인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포스트잇에 메모를 해야 하고요, 갑자기 파혼하고 달려온 전 애인도 떨궈내는 척하면서 다시 만나줘야 하고요, 부잣집 마나님 두명이랑도 싸워야 하고요,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그 모든 걸 하면서 김수현 스타일의 폭풍 대사도 끝없이 다다다다 내뱉어야 한다고요. 특히 대사는… 아아 정말 머리 아파요. 매번 대본을 글씨에 줄 긋는 그걸로…그러니까 글씨에 줄 긋는 그거….
-형광펜 말이군요. 그래도 좀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래요. 형광펜! 형광펜! 형광펜! 하여튼 다시 말하지만 기자님은 알츠하이머가 아니에요. 머리가 나쁜 거지.
-그래도 어젯밤엔 가스 밸브를 잠갔는지 안 잠갔는지 도저히 기억이 안 나서…. =그건 아까 말했잖아. 왜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건데? 넌 알츠하이머가 아니라니까. 넌 그냥 깜빡깜빡하는 형광등 기자야. 형!광!등! 형!광!등! 형!광!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