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과 두만강이 흐른다는 뜻에서 유래한 이름 량강도. 그곳에 사는 북한 어린이들에겐 크리스마스도 산타도 없다. 달걀을 최고의 선물로 여기던 아이들은 어느 날, 남한에서 날아온 애드벌룬에 담긴 로봇을 줍게 된다. 뜻밖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일으킨 소동을 담은 영화 <량강도 아이들>은 새터민이자 영화감독, 뮤지컬 제작자, 연출가로 활동하는 정성산 감독의 작품이다. 탈북자 감독이란 꼬리표에 넌덜머리가 났으면서도 첫 영화로 북한 어린이의 이야기를 만든 그는 “달걀 하나로 정을 주고받는, 이데올로기를 떠나 그저 순수한 동심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량강도 아이들>은 투자문제로 촬영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며 만들어낸 영화다. 그렇게 만든 영화를 7년 만에 개봉하는 지금, 정성산 감독은 지난 세월이 결코 아깝지 않았던 시간이라고 말했다.
-7년 만이다. 드디어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다. 기분이 어떤가. =다른 감독도 마찬가지겠지만 영화는 자식 같다. 7년 동안 여기저기서 버림받았던 내 자식이 드디어 빛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도망자다. 조국을 배반한 사람. 형제가 많은 집에서 태어나 조카가 참 많았는데 탈북하면서 제일 미안했던 사람은 조카들이었다. 나는 이렇게 잘 사는데 조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 가슴에 응어리로 맺혔다. 이런 응어리를 안 풀면 내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다. <량강도 아이들>은 이런 나의 한을 승화시킨 작품이다.
-7년간 개봉관을 잡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금전적인 문제인가. =시장의 논리에 이 영화가 지독히도 안 맞아서 그랬던 것 같다. 처음부터 신인이자 탈북자 출신의 감독, 북한 소재의 시나리오, 스타의 부재라는 세 가지 걸림돌을 안고 시작했다. 막상 영화를 찍기 시작해서는 끊임없는 촬영 중단과 재개의 반복을 겪었다. 결국 완성해서 올해 3월에 개봉할 예정이었는데 개봉관이 달랑 6개였다. 상업영화인데 독립영화로 분류한 것이다. 그래서 3월에 개봉하려던 일정을 미뤘다.
-북한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하고 모스크바로 유학을 가서 또 영화연출을 공부했다. 한국에서도 역시 영화연출을 공부했다고 들었다. 세 나라에서 세번이나 영화연출을 공부한 셈인데 나라마다 어떤 특징이 있고 어떻게 다른가. =모스크바에선 영화연출의 기초를 공부했다. 북한과 남한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다. 북한은 영화가 선전수단이다. 남한은 영화가 시장경제의 꽃이지 않나. 영화를 대하는 자세부터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러니 커리큘럼도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북한이 감독을 예술가로 평가해주는 반면 남한은 감독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것 같다.
-아역배우 캐스팅은 어떻게 했나. 아이들의 연기가 훌륭하더라. =전국의 아카데미란 아카데미는 다 돈 것 같다. 800명 가까이 되는 아역배우를 만났다. 백지에 가까운 배우를 원했는데 다들 어른 연기를 하려고 하더라. 그래도 찾고 또 찾아서 결국 40명 정도를 캐스팅했다.
-북한 말 가르치기도 쉽지 않았겠다. 어떤 식으로 지도했나. =아이들에게 배역이 무언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열흘간 파워트레이닝을 시켰다. 북한, 모스크바, 한국에서 내가 배운 것들을 토대로 커리큘럼을 짜고 애들끼리 즉흥연기도 시키는 등 서로 경쟁하게 만들었다. 아이들과 강원도에 가서 살도 빼고 살도 검게 그을렸다. 처음부터 북한 말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강원도 말부터 가르치고 북한 말을 알려줬다. 말이 자연스럽게 나와서 서로 농담도 주고받고 할 때쯤 시나리오를 나눠주면서 배역을 알려줬다.
-달걀 하나, 로봇 하나로 서로의 우정을 표현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참 순수하다. =이 영화에서 이데올로기는 찌꺼기다.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북한이나 남한이나 다를 것 없는 아이들의 동심과 우정이다. 마치 <시네마 천국> <천국의 아이들> 같은 영화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었다.
-공동연출인 김성훈 감독과는 어떻게 같이 작업하게 된 건가. =김성훈 감독은 김동현 대표가 추천했다. 내가 90% 작업해놓긴 했지만 김성훈 감독이 후반작업 과정에서 도와준 것이 많아 내가 먼저 공동연출로 이름을 올리자고 했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다음 작품은 작품성도 작품성이지만 흥행까지 성공할 수 있는 작품을 계획 중이다. 이제는 탈북한 감독이 아닌 흥행감독으로 불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