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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 레이스가 시작됐다 (2)
김도훈 2011-11-22

액션·스릴러로 칸 감독상 수상한 <드라이브>, 칸의 이변을 낳은 힘은?

<올드보이> 등이 떠오르는 폭력성

유럽적인 분위기로 만든 할리우드 장르영화를 어떤 예술적 눈속임수에 불과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사실 할리우드는 영화의 공장으로 팔려온 유럽 감독들의 위대한 전통 위에서 세워진 세계다. F. W. 무르나우와 프리츠 랑, 장 르누아르, 그리고 앨프리드 히치콕. 동시에 할리우드 장르의 전통은 유럽으로 건너가서 누벨바그와 장 피에르 멜빌을 창조했다. 미국과 유럽 사이에는 언제나 일종의 영화적 근친혼이 존재했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자신의 영화가 두 대륙의 혼합이라고 스스로 일컫는다. “나는 유러피언이다. 아주 오래된 유럽 동화의 공식을 이용해서 미국의 현대적 신화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 그렇다면 당연히 스토리텔링과 스타일 역시 그 모든 것의 혼합이 될 수밖에 없다.” <드라이브>를 보고 있노라면 박찬욱김지운의 할리우드 진출작들이 어떤 결과물을 내놓게 될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다. 박찬욱은 자신만의 감각을 할리우드의 오랜 호러-스릴러 장르에 이식 중이고, 심지어 김지운은 미국의 가장 근원적인 신화인 웨스턴을 만들고 있지 않은가.

<드라이브>가 유럽 감독의 복고 취향을 내세운 영화로서 예술영화 관객에게만 소비되지 않는 이유는, 재미있게도, 폭력이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사실 폭력의 묘사에 일가견이 있다. 국내에 DVD가 출시되진 않았지만 전주국제영화제에 소개된(그리고 어둠의 경로에서 꽤 인기를 모았던) 레픈의 전작 <발할라 라이징>은 끝없이 튀는 살점과 피의 향연이었다. 피의 향연은 <드라이브>에서 훨씬 강력해진다. 산탄총을 맞은 여자의 머리는 화면 앞에서 산산이 조각나고, 눈에 꽂힌 포크와 가슴에 꽂힌 칼에서는 피가 화산처럼 분출한다. 엘리베이터 시퀀스는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주인공은 자신을 죽이러 온 남자의 얼굴을 수십번 밟고 또 밟아서 수박처럼 형체도 없이 짓이겨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다른 유럽영화나 할리우드영화의 잔혹영화 전통이 아니라 지난 10여년간 독창적으로 잔혹한 폭력으로 유명해진 한국 장르영화들이다. 전혀 기대치 않았던 시퀀스에서 무자비한 폭력을 난데없이 보여주고, 또 폭력의 묘사를 거의 극단으로까지 밀어붙이는 <드라이브>의 방식은 할리우드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박찬욱, 김지운, 나홍진의 영화를 즉각적으로 떠오르게 한다. 특히 주인공이 장도리를 들고 좁은 클럽의 복도를 걸어가는 장면은 <올드보이>의 직접적인 오마주처럼 보일 지경이다.

유럽과 할리우드가 혼합된 하이브리드 생명체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드라이브>는 그저 개폼의 영화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뭔가가 존재하는 영화인가. 물론이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드라이브>는 처음부터 끝까지 개폼으로 달려가는 영화다. 다만 우리는 좋은 개폼과 나쁜 개폼을 구분해야만 한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지금처럼 추악하게 관습적이 되기 직전이었던) 70~80년대 할리우드 장르의 빛나는 관습을 유럽의 예술영화적 화법으로 새롭게 조명해내며 <드라이브>를 창조했다. 결과는 거의 마술에 가깝다. 통상적인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관습과 유럽영화의 화법이 부딪히거나 서로를 보완하면서 기묘한 상승을 불러일으키는 덕이다. 물론 이런 식의 마술은 우연으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속 수많은 영화광적 레퍼런스와 스타일이 니콜라스 윈딩 레픈이 꼼꼼하게 의도적으로 삽입한 요소라는 걸 생각해보자. <드라이브>는 타란티노의 <킬 빌> 이후 가장 타란티노적인 페스티쉬에 근사하게 도달한 영화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에 이 영화는 누아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어떠한 21세기의 할리우드영화들보다도 누아르적인데, 그건 로저 에버트의 설명을 빌려서 말하는 편이 낫겠다. “<드라이브>는 영화가 영웅을 통해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영웅의 그림자로부터 자양분을 얻어야 한다는, 오랜 할리우드 누아르 법칙의 예증이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말한다. “나는 세계 최고의 감독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만들고 있는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라면, 나는 최고의 감독이다.” 이 가히 ‘라스 폰 트리에’적인 덴마크적 뻔뻔함으로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할리우드에 당도했다. 그의 차기작은 괴상하게 매력적이다. 먼저 그는 타이의 방콕에서 라이언 고슬링과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를 주연으로 무에타이 누아르라 할 만한 범죄액션영화 <오직 신만이 용서한다>(Only God Forgives)를 만들고, 이어서 B급 SF영화 역사상 가장 막강한 컬트팬을 거느린 영화 중 하나인 마이클 앤더슨 감독의 76년작 <도망자 로건>(Logan’s Run)을 리메이크한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드라이브>의 기자회견 중 “<원더우먼>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밝혔는데, 만약 <도망자 로건>이 흥행에 성공한다면 워너브러더스는 레픈에게 <원더우먼>의 메가폰을 맡길 예정이다. 전례없는 영화광적 운전 <드라이브>는 니콜라스 윈딩 레픈이 앞으로 보여줄 광폭한 레이스의 시운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개폼이긴 한데 그냥 개폼은 아닌, 뭔가가 더 있는 개폼의 익스플로이테이션 레이스.

올해의 O.S.T

만약 <드라이브>가 올해의 영화가 아니라면, 적어도 <드라이브>의 O.S.T는 올해의 O.S.T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은 영화의 복고적인 전략을 O.S.T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전반적인 O.S.T를 지휘한 작곡가는 80년대 말 록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드러머였다가 이후 스티븐 소더버그의 음악적 파트너로 일해온 클리프 마르티네즈다. 레픈은 그에게 “80년대 스타일의 신시사이저 유로팝”적인 분위기를 요청했고, 마르티네즈는 빈티지 키보드를 이용해서 80년대 뉴웨이브 음악을 연상시키는 일렉트로닉 팝 스코어들을 만들었다. 어떤 인터뷰에도 언급이 없지만 두 사람이 반젤리스가 작곡한 <블레이드 러너>의 O.S.T를 꽤 많이 참고했던 것도 거의 분명해 보인다. 특히 재미있는 건 몇몇 삽입곡들이다. <드라이브>에는 카빈스키의 <나이트콜>(Nightcall)과 칼리지의 <리얼 히어로>(A Real Hero)가 여러 번 반복해서 삽입된다. 특히 80년대 탠저린 드림을 연상시키는 <리얼 히어로>는 라이언 고슬링이 등장할 때마다 “진짜 인간이고, 진짜 히어로야”라는 노골적인 가사를 읊조리며 80년대적인 풍미를 배가시킨다. <드라이브>는 눈으로 보는 동시에 귀로 듣는 영화다. 케빈 쉴즈가 참여한 O.S.T 없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클리프 마르티네즈가 지휘한 O.S.T 없는 <드라이브>는 상상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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