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잠깐 채식주의자가 되려고 마음을 먹은 적이 있다. 처음부터 일체 육류를 안 먹을 수는 없고, 일단 채소와 생선만 먹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주변에 ‘채식주의자’가 되겠노라고 떠들고 다니지는 않았다. 뭔가를 자처하면 그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할 의무가 따르기 마련이니까. 이를 윤리학에선 ‘공약의 부담’이라 부른다. 무슨 ‘주의’에 헌신(commit)하는 것은 멋진 일이나, 그에 따른 ‘부담’(burden)을 지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남성 페미니스트의 경우
아주 오래전에 어느 대담에서 페미니스트 교수를 만난 적이 있다. 남자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데에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제아무리 투철한 페미니스트라 하더라도, 마초들이 득실거리는 사회에 살다 보면 그 영향으로 정신과 신체의 어느 구석에 여전히 남성우월주의가 남아 있기 마련. 그것은 의식조차 되지 않은 것이기에, 본인이 아무리 조심한다 하더라도 언젠가- 무의식적 언행을 통해- 표출될 수가 있다.
똑같은 성차별 언사를 했다 하더라도, 대놓고 마초로 행사하는 이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이가 받는 사회적 비난에는 엄청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가령 한나라당의 홍준표 대표야 “이대 계집애들”이라는 실언을 하고도 여전히 대표직을 유지하지만, 그 발언이 평소에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던 그 교수의 입에서 나왔다면, 아마 그는 곧바로 사회적 매장을 당했을 것이다. 이 사회적 대우의 불평등이 바로 공약에 따르는 부담이다.
여기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아예 공약을 안 함으로써 부담 자체를 피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당당하게 공약을 하고 그에 따른 부담을 용감하게 끌어안는 길이다. 사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의는 과감하게 선언하고 밀고나가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가 뭔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누구보다도 그 대의에 헌신하고도 졸지에 ‘위선자’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
공약을 안 하는 데에는 분명한 이익이 있다. 예를 들어, 평소에 마초로 여겨지는 사람이 딱 한번 설거지를 하면 ‘좋은 남편’이라는 칭찬을 받는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자가 한번이라도 설거지를 거른다면 졸지에 ‘위선자’로 전락하게 된다. 그렇다면 선택은 분명하지 않은가? 설거지 한번 하고 칭찬받는 것이 설거지 한번 거르고 욕먹는 것보다야 백번 낫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스트’로 공약하기를 포기했다.
반면, 페미니즘을 공약한 그 교수는 진보적 남성들의 그런 비겁한 태도를 비판한다. 애초에 여성문제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모를까, 대부분의 진보적 남성들은 한국사회의 성차별주의에 대한 인식이 있다. 그런데도 제 몸 하나 편하려고 ‘공약’을 포기하는 것은 사실 그 사회적 불평등을 묵인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 하긴, 제 몸 하나 바꿀 의사가 없는 이들이 목소리 높여 다른 불평등을 비판하는 것 역시 위선이다.
어차피 ‘진보’를 공약하게 되면 어느 쪽으로 가든 위선자가 되기 쉽다. 그렇다면 아예 ‘진보’임을 공약하기를 포기하는 건 어떨까? 그럼 최소한 ‘위선자’가 될 위험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경우 당장 떠오르는 것은 이른바 ‘정체성’의 문제다. 즉 ‘진보’를 공약해온 사람들은 이제까지 ‘진보’라는 말로 포괄되는 일련의 가치관으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어왔다. 그것을 포기하면 그들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줄 수 없게 된다.
진보와 보수라는 공약
일반적으로 ‘진보’는 ‘보수’보다 더 많은 부담을 진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진보는 아무래도 사회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표방하는 가치가 많고, 그에 따르는 부담의 양도 당연히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왜 우리만 늘 더 많은 도덕적 부담을 지느냐’고 푸념해야 소용없다. 그 부담이 싫으면 그냥 사회개혁의 공약들을 포기하면 된다. 이 경우 그 사람의 정체성은 보수에 가까워질 것이다.
물론 보수라고 마냥 편한 것은 아니다. 보수 역시 하나라도 내거는 대의가 있는 이상, 그에 따른 부담을 질 수밖에 없다. 가령 똑같이 병역기피를 했다 하더라도, 평소에 ‘국가안보’를 떠들던 사람이라면 더 많은 사회적 비난을 받는다. 그 때문에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는 대통령이 될 수가 없었고, 김용갑 의원은 쏟아지는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으며, 안상수 대표는 사회적 비난을 넘어 아예 사회적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병역’을 제외하면 우리 사회에서 보수가 지는 부담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가족의 중시, 성도덕의 강조.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같은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대표적인 보수적 가치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보수적 정치인은 이런 문제에서는 별로 부담을 지지 않는다. 왜? 그들은 애초에 그것을 공약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공약이 없기에 한국의 보수는 무정형에 가깝다. 한국의 보수에게 ‘멋’이 없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존재미학으로서 공약
제대로 된 사회라면 진보든 보수든 자신의 가치관을 공약해야 한다. 진보는 진보대로, 보수는 보수대로, 부담을 지기 싫어 가치관의 공약을 포기한다면, 사회 전체는 무정형에 가까워질 것이다. ‘왜 진보만 도덕을 지켜야 하냐?’는 항변은 일견 정당해 보이나, 사실 도덕은 진보만 지키는 게 아니라 보수도 지켜야 하는 어떤 것이다. 진보마저도 공약하기를 포기한다면, 사회 전체가 달랑 ‘안보’ 하나 내세우는 한국적 보수처럼 무정형이 될 것이다.
삶에 의미를 주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공약을 해야 한다. 공약을 한다는 것은 그에 따르는 부담 역시 기꺼이 지겠다는 선언이다. 하지만 이를 귀찮은 의무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공약을 통해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자신을 형성하는 존재미학의 실천이다. 그림을 그릴 때에 화면에서 미적 필연성을 따르면서도 우리가 그것을 제약으로 느끼지 않듯이, 공약의 부담을 지는 것도 자유로운 행위가 될 수 있다.
어떤 주의, 이념, 신앙에 대한 헌신(commitment)은 삶에 의미와 형태를 주는 데에 반드시 필요하다. 때문에 가끔 지나치게 멋있어지고 싶었던지 쉽게 공약을 남발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당연히 그들은 머지않아 대중 앞에 위선자로 드러나고 만다. 따라서 약속은 지킬 수 있는 만큼 하는 게 좋다. 한 인간의 멋은 보이는 데서 공약을 내거는 순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에 따르는 부담을 기꺼이 질 때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윤리학의 개념을 슬쩍 과학의 영역에도 옮겨놓을 수 있을 것이다. 과학자들 사아에 떠도는 격률이 있다. “약속을 되도록 적게 하라. 그래야 더 많이 지킬 수 있다.” 우리는 이 격률과 정반대로 살았던 한 사내를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곧 척추손상으로 휠체어에 앉은 이들을 치료해줄 거라고 약속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일어나 걸으라.” 그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사도의 권능을 약속했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 국위선양의 공약은 결국 국제적 망신으로 되돌아왔다. 이 사기꾼이 나타나 다시 공약을 남발한다. 이번엔 매머드를 복원하겠단다. 매머드를 해동하되 그는 냉동시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