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카다피의 시신은 정육점의 냉동 창고에서 대중에게 공개됐다. 사실 그보다 더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독재자도 있었다. 바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무솔리니다. 그는 연합군이 진주하자 도주하던 중 항독 빨치산들에게 체포되어 부인과 더불어 처형된 뒤, 둘이 함께 건물에 거꾸로 매달렸다. 히틀러가 자살한 뒤 자신의 사체를 소각해 달라고 부탁한 것은 무솔리니의 끔찍한 최후를 목격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냉장고 속의 독재자
카다피의 죽음은 물론 무솔리니의 그것에 비하면 점잖은 편이다. 하지만 무솔리니가 죽은 것은 60여년 전의 일이다. 게다가 지금은 ‘디지털 시대’가 아닌가. 노인에게 린치를 가하고, 사체를 바닥에 끌고 다니는 행위가 SNS, 스마트폰, 페이스북 같은 낱말과 공존한다고 생각해보라. 우리가 그 끔찍한 장면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휴대폰이라는 디지털 테크놀로지 덕이었다. 이 얼마나 초현실주의적 상황인가.
한때는 완전히 벌거벗겨지기도 했으나 냉동 창고 속에 안치된 카다피는 그나마 아랫도리는 챙겨입고 있다. BBC 화면이 그 냉동 창고 앞에 줄지어 선 리비아 인민들을 보여준다. 저마다 얼굴에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냉동 창고라 하더라도 시신에서는 아무래도 악취가 나는 걸까?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제 순서가 되자, 턱밑에 걸치고 있던 마스크를 올려 입과 코를 가린 채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왜 굳이 사체를 보려는 걸까? 아마도 그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가령 폭군 네로가 환생한다는 두려움이 요한계시록을 낳은 원인 중 하나라는 설명이 있다(계시록에 언급된 사탄 666은 일반적으로 네로를 가리킨다고 해석된다). 워낙 잔혹한 인물이었던지라 죽은 뒤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두려워했다는 얘기다. 카다피의 사체를 보려 함은 그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한 게 아닐까?
사로잡힌 왕의 목을 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가 차르 일가를 처형했던 것은, 내전을 빨리 종식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존재하는 백군들에게 여전히 심리적 구심의 역할을 할 테니까. 루마니아에서 요식적인 스탈린 재판으로 차우셰스쿠를 급히 처형했던 것 역시 가능한 한 내전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였다. 미국이 석연찮은 정황에서 빈 라덴을 사살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거다.
하지만 어느 경우에도 대중에게 시체를 공시하는 일은 없었다. 죽은 왕의 사체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관습은 차라리 고대에 속할 거다. 그때에는 사로잡힌 상대국의 왕을 모욕하고, 베어진 그의 목을 창끝에 꿰어 성문에 매달아놓곤 했다. 그것은 아무런 전략적 의미도 없는, 그저 원시적인 복수심의 표현이었다. 고대인들은 근대인처럼 ‘합리적’이지 않아 계산적으로 행동하기보다는 감정에 몸을 맡기기를 좋아했다.
리비아 사태는 이 고대의 원형을 닮았다. 왜 시민군은 카다피를 학대하는 병사들을 통제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통제를 안 한 것인지도 모른다. 2차대전 당시 연합국쪽에서 소련군이 독일로 진주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강도, 강간, 학살을 만류해달라고 요청하자, 주코프 장군은 태연히 “우리 병사들도 즐길 권리가 있소”라고 대답했단다. 카다피의 수난극도 일종의 민중의 카니발로 묵인된 게 아니었을까?
리비아 시민군이 카다피의 시신을 아무도 모르게 사막 어딘가에 매장한 것은 합리적 판단이었다. 아무리 일인 독재라 하더라도, 독재자 한 사람이 모든 이들의 뜻을 거슬러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독재를 지탱해온 세력은 여전히 카다피를 따를 것이다. 그의 매장 장소가 알려질 경우, 그곳은 순교자(?)를 흠모하는 이들의 성지가 되게 마련. 미국이 빈 라덴의 사체를 대양의 어딘가에 수장한 것과 같은 이치다.
사체의 공시
시민군의 지휘부는 분명히 카다피를 체포했을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할지 지침을 내렸을 것이다. 그 지침은 지켜지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참여한 시민군에게 정규군과 같은 ‘지휘’와 ‘통제’의 엄격함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체포 직후의 상황은 우발적 사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의 사체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결정만은 결코 우발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나름대로 ‘목적’이 있었을 거다.
그 목적은 그의 공식적 ‘이미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닐까? 체포된 카다피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벗겨진 모자 아래로 드러난 그의 머리는 보기 흉할 정도로 머리칼이 빠져 있었다. 평소에 입고 다니던 멋진 아프리카 패션을 벗겨내자 드러난 것은 여느 노인과 다르지 않은 노화한 몸뚱이. 게다가 그 몸은 정육점에 전시됐다. 심지어 추종자들의 향수 속에서도 그는 자신이 누리던 그 카리스마를 더 이상 가질 수 없을 거다.
물론 정치적으로 사체를 공개하는 게 늘 모욕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고인의 숭배를 위해 사체를 공개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영구 보존된 레닌이나 김일성의 사체를 생각해보라. 프랑스 혁명 당시 왕당파가 보낸 여인에게 암살당한 혁명가 마라는 암살 당시의 모습 그대로 욕조에 몸을 담근 상태로 파리 시내에 공개됐다. 물론 ‘인민의 벗’을 암살한 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연출이었다.
정치적 네크로필리아
‘마카브르’(macabre)라는 말이 있다. 어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시체와 관련된 어떤 것을 가리킬 때 널리 사용된다. 김연아의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를 통해 이 말은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중세의 전설에 따르면 공동묘지의 시체들이 밤 열두시가 되면 무덤에서 나와 집단으로 춤을 춘다고 한다. 그것이 ‘죽음의 무도’다. 김연아가 사용한 생상스의 음악은 이 중세의 전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죽음의 무도’는 동시에 중세에 교회나 수도원 혹은 공동묘지의 벽에 그려졌던 벽화의 이름이기도 하다. 반쯤 썩은 시체들이 산 자들의 손을 잡고 그들을 공동묘지로 이끄는 모습. 이는 물론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라’(memento mori)는 종교적 메시지의 시각적 표현이었다. 근대 들어와 이 벽화들은 파괴되거나 교회의 벽에서 지워진다. 근대인들에게는 중세의 이 마카브르 취향이 그저 고약한 몰취향으로 여겨진 모양이다.
사로잡힌 왕을 모욕하고 그의 시신을 공개하는 것은 아득한 고대에 속한다. 선동의 목적으로 사체를 이용하는 것은 아무리 늦어도 프랑스 혁명기에 속하는 얘기다. 리비아에서 벌어진 사태는 그 자체가 마카브르다. 이미 오래전에 인류에 망각됐던 정치적 마카브르의 문화가 느닷없이 21세기에 살아 돌아왔다. 역사의 무덤에 묻혔던 것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는 것은 무덤에서 돌아온 망자를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모욕을 위해서든 숭배를 위해서든 사체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대중의 은밀한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리라. 프로이트라면 그것을 ‘죽음의 충동’이라 부르지 않을까? 삶의 충동이 있기에 우리는 시체를 혐오하나, 죽음의 충동이 있기에 우리는 은밀히 그것을 선호한다. 정치적 마카브르가 작동할 수 있는 바탕이 대중의 이 금지된 욕망이라면 그 역시 일종의 포르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것은 포르노다. 정치적 네크로필리아다.
리비아의 시민들. 그들은 왜 카다피의 시체가 보고 싶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