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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주의 TVIEW] 중년 유머… 마저 좋아합니다

<천일의 약속>의 노티나는 대사가 싫지 않은 이유는

“너 정신병자냐, 이 악질 반동분자 같은 자식아!” 이 얼마 만에 들어보는 고색창연한 욕설인가. 나는 SBS <천일의 약속> 예고편의 이 한마디로 대가 김수현의 귀환을 실감했다. 파르르 분노하는 이미숙이 반동분자로 지목한 김래원은 사회적, 정치적 변화에 대한 반동을 꾀하는 구성원… 일 리는 없고 그저 결혼을 앞두고 다른 여자가 있다며 파혼을 입에 담은 몹쓸 예비사위일 뿐이다. ‘악질 반동분자’라는 표현은 일제 부역자나 지주를 지목해 ‘숙청’하는 특정한 세대체험을 했던 조부 세대가 공유하고, 또 그 수사에 노출되었던 자식 세대는 본래 맥락과 관계없이 ‘처단, 응징’의 뉘앙스로 사용하던 일종의 오래된 유행어다. 극중 50대로 추정되는 이미숙 또래라면 본인이 생각하는 최상급의 나쁜 놈을 욕할 때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법한 대사다.

그러나 김수현 작가가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현대물에서 20대 젊은이들의 대사까지 예스런 표현을 고집할 때는 도리없이 흠칫 놀라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 극중 김래원의 결혼상대인 20대 예비신부는 웨딩드레스 피팅룸에서 화사하게 웃으며 말한다. “저기요 선생님 (드레스 허리) 늘구지 마세요.” 이게 웬 노티나는 대사란 말인가. 이건 마치 MBC <아현동 마님>의 부길라씨가 한번도 이름으로 놀림당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저 부길랍니다” 하고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을 봤을 때의 이질감이랄까. ‘늘구다’는 요즘 20대 여성이 보편적으로 쓰는 말은 분명 아니다.

다른 장면을 보자. 여주인공 수애와 그녀의 직장동료들은 점심식사 자리에서 ‘소간지(소지섭) 포스’와 ‘연탄집 딸처럼 안 씻은 것 같은’ 목을 가진 모 연예인을 품평한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연탄집 딸’이라는 표현과 ‘소간지’라는 유행어 사이에는 줄잡아 20년의 시간차가 있다. 이 시간차는 보편적인 20대 여성이 쓰는 어휘라는 횡적 기준을 포기하고 부모가 쓰던 표현이 20년 동안 같이 살아온 자식에게 대물림된 것이라고 생각해야 간신히 납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족 안에서 동년배와 교류 없이 지낸 것 같은 청소년들, 김수현 홈드라마의 막내딸이나 아들들은 하나같이 유머감각이 젬병이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 와인을 든 이종원은 배종옥을 향해 “메루치(멸치) 볶고… 메르시 보꾸”라는 구닥다리 유머를 날리는데, 이런 중년 유머의 패턴은 그대로 10대나 20대 캐릭터에도 이어진다.

그러나 김수현 작가가 동시대와의 시간차를 좁혀야 한다거나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동시대의 젊은이들과 긴밀하게 호흡하는 트렌디 드라마의 젊은 작가가 아무리 필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들이 쓴 시대극은 짧은 대사 한줄로 지난 세대의 어떤 장면을 환기시킬 수 있는 중견 작가들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유행어나 일상표현을 다루는 방식은 작가마다 다르며 그들의 세계관이 당대의 시청자와 만나는 방식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김운경 작가의 캐릭터가 지금 다시 돌아온다면 어떨까? 가방끈은 짧지만 아는 척 나서기를 좋아하는 뚝배기 집 안동팔이라면 이렇게 동시대와 조우하지 않을까. ‘저기요, 사장님 자꾸만 저를 네가티브하시면 안되걸랑요?’ 어쩌다보니 안동팔로 새고 말았네. 늦기 전에 고백해야지. 툴툴거렸지만 실은 김수현 작가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팬이라고. 물려받은 것이라곤 자존심이 전부인 주인공들이 들끓는 욕망과 자격지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열망하는 김수현 작가의 시대극과 통속극을 볼 때면 상수동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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