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알려진 사실들에서 알려지지 않은 결론을 추론해야 하는 상황이 있다. ‘이미 알려진 것’과 ‘아직 도출해야 할 결론’을 이어줄 사실들이 빠져 있기에, 이 경우 그 ‘잃어버린 고리’를 둘러싸고 온갖 가설과 억측이 난무하게 된다. 과학은 물론이고, 정치나 사법, 그 밖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는 예외라기보다는 차라리 정상적 상황. 이 경우 우리는 동일한 사안에 대해 서로 비슷하게 개연적인, 그러나 가끔 서로 모순되기도 하는 복수의 가설들을 갖게 된다. 그중 어떤 것을 택해야 할까?
인색함의 원칙
이때 사람들은 흔히 ‘오캄의 면도날’(Occam’s razor)을 얘기한다. 즉 ‘이론을 구성할 때 불필요한 가설들은 되도록 제거하라’는 격률이다. 이 원칙은 스콜라 철학자 윌리엄 오캄(1285∼1347)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저서에 나오는 문장이다. “더 적은 수(의 가설)로 할 수 있는 것을 많은 수(의 가설)로 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하지만 동일한 문장이 한 세기 앞선 어느 프란치스코 수사의 저서에 이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캄은 이 원칙을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수학자 윌리엄 로원 해밀턴이 이 인색함의 원칙(lex parsimoniae)을 처음으로 오캄의 이름과 결부시키고, 존 스튜어트 밀이 이를 인용함으로써 이 원칙은 오늘날과 같은 이름을 갖게 된다. ‘오캄의 면도날’은 “실체들은 필요 이상으로 증식되어서는 안된다”는 17세기 요하네스 클라우베르크의 명제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클라우베르크가 현실에서 불필요한 ‘실체’를 제거한다면(19세기까지도 사람들은 대기 중에 ‘에테르’라는 매체가 존재한다고 가정했다), 오캄은 이론에서 불필요한 ‘가설’을 제거하려 한다.
‘불필요한 가설을 최소한으로 줄여라.’ 이 원칙의 효용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다. 당시에 관측이 더욱더 정밀해지면서, 완벽한 원이라 믿었던 행성들의 궤도가 사실상 타원형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물론 지구가 움직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코페르니쿠스는 타원의 수를 되도록 줄이는 방법을 찾다가 결국 지동설에 도달한다. 이를 받아들일 경우 타원의 수가 대폭 줄어들면서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천구의 모델이 얻어지기 때문이다.
왜 진리는 단순할까? 이 물음에 대한 최초의 대답은 멀리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자연은 짧은 경로를 선호한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가설 역시 간단할수록 사실에 부합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 하긴, 우리도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갈 때 되도록 짧은 경로를 선택하지 않던가. 하지만 “자연은 짧은 경로를 선택한다”는 명제는 그저 경험을 통해 얻어진 ‘가설’일 뿐, 그 자체가 논증을 통해 확증된 진리는 아니다. 실제로 우리도 가끔 어떤 이유에서 길을 돌아가지 않던가.
오캄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원용하면서도 “자연은 짧은 경로를 선호한다”는 명제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스콜라 철학 내에서 ‘자연이 짧은 경로만 취한다’는 명제는 창조주의 능력을 제약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캄은 이 원칙을 자연이 아니라 이론에만 적용시켰다. 즉 자연 자체가 반드시 단순하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사유를 위해서는 되도록 간단한 가설을 선택하는 게 낫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의 법칙’으로 보았던 것을 오캄은 ‘실용적 규칙’으로 간주한 셈이다.
하지만 이처럼 면도날을 존재가 아니라 사유에만 들이댈 경우, 대답하기 힘든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존재가 복잡하다면, 왜 그것에 관한 사유가 반드시 단순한 경로를 취해야 하는가? 현실이 복잡하다면 간단한 설명이 반드시 현실에 대한 옳은 설명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복잡한 상황을 단순화하는 것이야말로 현실에 대해 왜곡된 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오캄의 면도날’이라는 원칙을 받아들이려면, 먼저 그것의 효율성을 이론적으로 근거지어야 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오캄의 면도날을 증명하려는 시도들은 곧바로 순환논법에 빠지게 된다. 비순환적 논증으로는 그저 ‘가설의 수가 적을수록 오류의 확률도 줄어들어 진리에 근접할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 정도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캄의 면도날은 아직까지도 과학의 여러 영역에서 발견술적(heuristic) 원리로 널리 사용된다. 이론은 간단할수록 아름답다. 하지만 미가 반드시 진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캄의 면도날을 통해 생산적 결과를 얻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는 할 수 있을 거다.
면도날, 신의 목을 베다
‘오캄의 면도날’과 관련하여 역사상 가장 통쾌한 예는 아마도 나폴레옹과 라플라스 사이에 오갔던 대화일 거다. ‘왜 당신의 이론에는 신이 등장하지 않느냐?’는 황제의 물음에 라플라스는 “내 이론에 신이라는 가설은 필요하지 않다”고 대답한다. 이로써 신은 졸지에 하나의 ‘가설’, 그것도 불필요한 가설로 격하된다. 근대의 철학자들이 여전히 최초의 동작주(신)를 가정했다면 라플라스는 역사상 최초로 신이 없이도 돌아가는 우주의 상을 제시한 셈이다. 단두대가 왕의 목을 벴다면 면도날은 신의 목을 벴다.
오늘날의 예를 들어보자. ‘판스페르미아’(panspermia)라는 이론이 있다. 지구의 생명이 외계의 운석에 들어 있던 씨앗에서 출발했다는 이론이다. 이를 믿으려면 몇 가지 부가적 가설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가령 (1) 지구 근처에 지구와 비슷한 행성이 존재해야 하며, (2) 어떤 이유에선지 그 행성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지구에 도달하되, (3) 대기권을 통과하면서도 불타 없어지지 않았어야 한다. 이렇게 가설의 수를 늘릴 바에는 차라리 생명이 지구에서 발생했다고 말하는 게 나을 거다.
오캄의 면도날은 알게 모르게 일상에서도 널리 사용된다. 흔히 ‘한번 거짓말을 한 사람은 계속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진실은 단순한 것이다.” 예를 들어 몇년 전 청문회에서 어느 장관 후보의 부동산 구입 사실이 적발됐다. 그녀는 그 땅을 왜 샀을까? 가장 단순한 설명은 그것이 ‘시세 차익을 노린 투기’였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신선했다. “자연의 일부인 대지를 사랑했다.” 이 설명이 성립하려면 그녀가 평소에 투철한 생태주의자였다는 (대단히 비개연적인) 가설이 추가로 필요할 거다.
검찰의 면도날
곽노현 교육감 사건을 보자. 여기서 ‘오캄의 면도날’을 쥔 것은 검찰이다. ‘대가의 약속이 있었고, 대가의 지불이 이루어졌다. 고로 곽 교육감은 유죄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도 명쾌한 설명인가? 하지만 거기서 곧 곽 교육감이 유죄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단순하다’는 원칙은 검증되지 않은 가설, 기껏해야 확률론적 타당성만 갖는 준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곽 교육감의 옹호자들은 “단순한 것이 곧 진실은 아니”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실제로 진실은 때로 매우 복잡하다.
하지만 복잡한 진실을 남에게 납득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해명의 스토리가 길어질수록 남에게 입증해야 할 사실도 늘어나니까. 의심에 절은 한국의 도마들에게 그 모든 사실을 다 어떻게 납득시키겠는가? 그의 “선의”가 진실이라면, 곽 교육감 본인은 정말 답답할 거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 게임에서 입증의 책임은 곽 교육감이 아니라 검찰에 돌아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