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수사학’이라고 하면 거의 경멸어로 여겨지나, 고대의 수사학은 자유시민이 갖추어야 할 교양의 하나였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폴리스의 일원이 되어 정치에 참여해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적어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라는 것은 결국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는 일로, 그러려면 먼저 대중을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수사학은 바로 거기에 사용되는 기술이었다. 정치를 통해서 인격이 완성된다고 믿는 사회에서 수사학은 심지어 인문교양이었다.
고르기아스와 소크라테스
당시엔 법정에서도 이해 당사자가 배심원들 앞에서 직접 말로 승부를 가렸기에, 공적 생활만이 아니라 사적인 영역을 위해서도 수사학은 매우 중요했다. 철학사에서 ‘소피스트’라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 이렇게 대중에게 설득의 기술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은 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오늘날 소피스트가 아예 궤변론자와 동의어가 된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철학과 수사학의 갈등을 보여주는 플라톤의 대화편이 있다. 바로 ‘고르기아스’편이다.
고르기아스는 오늘날로 말하면 ‘논객’. 그는 감히 소크라테스 앞에서 자신의 말재주를 자랑하기 시작한다. 언젠가 수술을 받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데도 한사코 몸에 칼을 대는 것을 거부하는 환자가 있었단다. 의사도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해 설득을 포기하고 말았는데, 자신이 나서서 몇 마디 말로 그를 설득해 결국 수술을 받게 했다고. 그러니 만약 시의 대표를 뽑는 민회가 열려 의사와 자신이 출마하면 사람들이 과연 누구를 선출하겠냐는 것. 물론 이 자화자찬이 노회한 소크라테스에게 통할 리 없다.
소크라테스의 반론, 간단하고 명료하다. 가령 수학자는 증명으로 다른 학자들을 설득하고, 의사는 전문적인 의학적 지식으로 환자들을 설득한다. 하지만 고르기아스여, 의학과 관련하여 그대에게 ‘에피스테메’(epistheme), 즉 참된 지식이 있는가? 물론 떠돌이 논객에게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대는 환자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참된 지식을 가지고 그를 설득한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그대는 진리 없이 설득만 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진리 없이 설득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다시 있겠는가?
괴물의 수사학
플라톤이야 대중은 억견에 휩쓸리기 쉬운 존재라 보았다. 고르기아스가 자랑하는 대로, 정말 민회에서 참된 지식 없이 설득의 기술만 가진 자들이 뽑힌다면 과연 나라꼴이 뭐가 되겠는가? 플라톤이 민주정을 회의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게 어디 고대에만 적용되는 얘기겠는가? 독일은 진리 없는 설득으로 커다란 역사적 오류를 범해야 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나치는 철저히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집권했다. 그들은 선전선동을 통해 대중을 설득해 자기들 편으로 만들었다.
한편 고르기아스편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대목이 있다. 아무튼 고르기아스는 의사도 설득하지 못한 환자를 설득했고, 결국 그의 목숨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왜 그를 비난해야 할까? 문제가 있다면 차라리 참된 지식을 가지고도 환자를 설득하지 못한 의사의 무능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혹은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을까? 고르기아스는 수사학적 능력으로 환자를 설득했고, 의사는 의학적 지식으로 환자를 수술했다. 둘의 협력을 통해 환자는 목숨을 구했다. Good job.
여기에는 두 극단이 존재한다. 하나는 설득력이 없는 ‘에피스테메’, 다른 하나는 진정성이 없는 ‘레토릭’이다. 1930년대 독일사회는 진리에서 동떨어진 수사학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괴벨스로 대표되는 나치의 선전선동은 경제위기로 무력감에 빠져 있던 독일의 대중을 완벽하게 사로잡은 반면, 나치의 주장이 허위임을 알고 있었던 지식인들은 나치의 정치적 수사학을 무력하게 바라보며 자신들의 서재에 처박혀 있었다. 나치의 집권은 이처럼 에피스테메와 레토릭의 극단적 분리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진리를 버리란 말입니까
진리가 운전대라면 레토릭은 동력원이라 할 수 있다. 칸트의 말을 패러프레이즈하면. 거기서 “설득 없는 진리는 공허하고, 진리 없는 설득은 맹목이다.” 문제는 그 수사학이 종종 진리와 동떨어져 있다는 데에 있다. 수사학이 거의 경멸어로 전락한 오늘날, 정치에서는 여전히 수사학이 난무한다.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있거나, 중요한 정책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되면 정치인들은 대중을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수사학을 구사하게 마련이다. 그 결과 언론을 통해 수사학의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수사학의 전쟁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17대 대통령 선거 때 보수언론과 보수정당은 “노무현 후보의 장인이 빨치산이었다”고 공격했다. 이는 물론 노 후보에게 빨간색을 칠하기 위한 부당한 공격이었다. 연좌제를 금지하는 것이 이미 우리 사회에 합의된 법 상식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나는 무고하다’고 변명하다가 페이스를 잃었겠지만 노 후보는 적절한 수사학으로 위기를 외려 기회로 바꾸어놓았다. “그럼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전국의 아내들은 이 한마디에 진한 감동을 먹었다.
논리가 논객의 실력이라면 수사학은 그의 무기다. 예를 들어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박원순 후보를 향해 “청문회 수준의 검증을 하겠다”고 말했다. 물론 그의 말이 왜 적절하지 않은지 구구절절 따져가며 논리적으로 반박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잖아도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익사할 것만 같은 이 시대에 그 긴 얘기를 들어줄 만큼 한가한 대중은 없다. 이 경우 짧은 논리적 방어와 정치적 공격을 동시에 수행하는 게 제격이리라. “한나라식 청문회라면 유영철도 장관이 됐을 것.”
수사학의 도리
수사학의 목적은 사람들을 설득해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데에 있다. 논리는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때문에 수사학은 두뇌와 신체를 이어주는 고리, 즉 대중의 감정과 정서를 겨냥한다. 그것은 때로는 분노를, 때로는 연민을, 때로는 감동을, 때로는 웃음을 자아낸다. 내 경우에는 웃음을 선호한다. 발터 베냐민이 말한 것처럼 “때로는 횡경막의 발작이 더 큰 진리를 전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감정을 자극해 행동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수사학은 선정적(煽情的)이며 선동적(煽動的)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사학은 매우 위험한 무기이기도 하다. 가령 수사학은 논리학이 아니기에 거기에는 과장(이른바 ‘수사적 과장’)이 있게 마련이다. 방금 위에 든 예에도 과장은 존재한다(아무리 한나라당이더라도 설마 연쇄살인범을 장관으로 임명하겠는가?). 하지만 이는 과거에 청문회에서 제 후보자의 온갖 의혹을 다 덮어주던 한나라당의 행태를 부각시키기 위한 문학적 장치지, 글자 그대로 그들이 흉악범을 옹호한다는 뜻은 아니리라. 대중도 그것을 알기에 그 말에 경악하지 않고 웃는 것이리라.
수사학은 감정의 선을 건드리기 위해 약간의 과장과 왜곡을 허용한다.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에서 약간 벗어나는 것도 허용된다. 운전에 비유하자면 주행을 하다가 살짝살짝 상대편 차선을 밟는 것과 같다고 할까?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수사학이 논리의 차선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그 경우 수사학은 가령 괴벨스의 그것처럼 아주 고약한 종류의 선전선동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다시 운전에 비유하자면 가끔 논리의 차선을 벗어나더라도 수사학은 결코 중앙선을 넘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