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거짓말> Off White Lies 마야 케닉 | 이스라엘 | 2011년 | 86분 | 플래시 포워드
열세 살, 주근깨 소녀 리비가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도착한다. 캘리포니아에 있는 엄마 곁을 떠나 아빠와 함께 살기 위해서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아빠 샤울은 집도 없는 떠돌이 신세에, 뻔뻔하고 대책 없이 낙관적이기까지 하다. 친구에게 신세를 지려던 샤울은 때마침 폭격을 맞아 난민수용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딸과 머물 장소를 찾아 묘책을 세운다. 바로 난민들에게 거처를 제공하는 집에 들어가 난민 행세를 하는 것. 이때부터 이들 부녀는 이러저러한 거짓말들을 꾸며내며 공범이 된다. 이들은 샤울의 잡동사니 창고에서 옛날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보며 과거를 추억하고, 함께 무전취식을 하고, 또 소박한 생일 파티도 하면서, 서로 떨어져 있었던 시간의 공백들을 채워나간다. 리비가 샤울에게 마음을 여는 동안, 그들을 받아 준 레히만 가족과의 어색한 관계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2차 레바논 전쟁을 배경으로 샤울 부녀가 겪는 몇 주간의 해프닝을 담는다. 그러나 폭탄이 떨어지는 긴박한 상황은 샤울의 무능과 발명품을 둘러싼 아이러니한 촌극들의 배경에 그친다. 영화 속에서 폭탄보다 더 위험한 것은, 사춘기 소녀의 외로움과 불안정한 가족 관계 속에 숨겨져 있던 오랜 상처들이다. 곧 탄로 날 거짓말처럼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던 두 가족의 연대가 위기를 맞게 되면서, 오랫동안 묵혀 있던 리비의 상처도 폭발하게 된다. 영화는 두 가족들 사이에 다양한 감정이 싹트고, 그것이 복잡하게 얽히며 배반과 실망, 아픔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매우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예민하고 내성적인 사춘기 딸 리비와 엉뚱하고 낙천적인 아빠 샤울 콤비의 연기 조합도 좋다. 신중한 연출은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두 부녀 사이의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영화의 결론은 냉정함과 따뜻함 간의 이상적인 균형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소박한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