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짓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 미움 받는 것도 이제는 지겹다. 곽노현 사건을 보면 정권이 바뀌어도 세상은 바뀔 것 같지 않다. 표면에 거센 풍랑이 일어도 깊은 바다는 평온하듯이, 정권 교체의 요란함 속에서도 끄떡없는 어떤 습속의 강고함이 있다. ‘우리가 남이가.’ 진보나 보수나 어차피 이 봉건적 습속에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나보다. 진보니 보수니, 여당이니 야당이니, 패를 갈라 서로 멱살을 잡아도, 우리 모두는 결국 ‘한국인’이다.
‘공직자에 대한 검증은 가혹해야 한다.’ 얼마 전만 해도 이게 진보진영의 입장이었으나, 곽 교육감 사건 이후 이 원칙은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대체됐다. 그렇다고 해서 ‘가혹한 검증의 원칙’이 완전히 폐기된 것은 아니다. 적용 범위가 ‘적군’으로 좁혀졌을 뿐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이 전면화된 것도 아니다. 무죄추정의 특전은 ‘아군’으로 국한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거의 전쟁이다. 전쟁터에서 무슨 ‘정의’를 찾는단 말인가?
합리적 의심
하긴 철학에도 이른바 ‘호의의 원칙’(principle of charity)이란 게 있다. 미국의 철학자 도널드 데이비슨이 주장한 원칙으로, 어떤 텍스트를 해석할 때 그게 아무리 이상해 보여도 최대한 그 텍스트 안의 문장들이 합리적 연관을 맺고 있다고 가정해주자는 것이다. 최대한의 호의적 해석을 통해 텍스트가 말이 되도록 문장들 사이에 유의미한 연관을 구성한 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비판을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이 해석학의 원칙을 도덕적, 법률적 판단으로 확장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곽 교육감은 자신이 대가성 없이 순수한 “선의로” 2억원을 줬다고 주장한다. 그가 그렇게 주장한다면 일단 그의 행위와 언급을 최대한 호의적으로 해석해줘야 한다. 그리고 이미 드러난 사실들을 가지고 그의 선의를 뒷받침해주도록 상황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랬는데도 이해가 되지 않고 남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합리적 의심의 대상이 될 것이다.
검찰이 언론을 통해 흘린 모든 것들은 일단 믿지 않기로 하자. 논란의 두 당사자가 모두 인정하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 곽 교육감은 강경선 교수를 통해 2억원을 박명기 교수쪽에 전달했다. 둘째, 돈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강 교수와 박 교수의 동생은 차용증을 작성했다. 셋째, 그 차용증은 강 교수와 박 교수(혹은 동생)의 명의로 두 사람이 채권-채무의 관계를 뒤바꾸어가며 이중으로 작성했다. 여기까지가 사실이다.
곽 교육감의 말을 들어보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사람이 왜 공소시효도 지난 시점에서 돈을 건넸(는가)나 하는 점.” 이는 돈을 건넬 당시 곽 교육감이 그것이 위법이 아니라고 판단했음을 시사한다. 그로서는 그게 선의라 판단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그 선의를 공개하지 않았는가? 호의적으로 해석하자. 곽 교육감은 자신의 곤란한 처지를 밖으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박 교수의 마음을 헤아리느라 그랬을 것이다.
문제는 차용증. 선의로 준 돈에 왜 차용증을 받을까? 다시 호의의 원칙을 적용하면 곽 교육감은 차용증의 존재를 아예 몰랐을 수도 있다. 이 경우 강 교수의 행위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왜 제멋대로 제 이름으로 제 것도 아닌 돈의 차용증을 받고, 왜 꾸지도 않은 돈을 꾼 것처럼 박 교수쪽에 차용증을 써주었을까? 이는 어떻게 호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곽 교육감쪽의 해명에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도덕적 스캔들
곽 교육감을 방어하는 논리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궁예의 관심법’으로, 곽 교육감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이들은 사실이나 정황에 관계없이 그의 선의를 믿는다. 둘째는 ‘도덕의 허무주의’로, 곽 교육감을 위해 아예 도덕을 내다버리는 것이다. “도덕성 따위는 보수에게나 갖다줘라.” 셋째는 ‘우익 마초주의’로, 적 앞에서 도덕에 집착하는 것은 자학증, 결벽증 혹은 비겁함의 발로일 뿐이라고 짖는 입장이다.
곽 교육감의 사퇴를 주장한 이들은 저 세 논리에 따라 각각 “의심 많은 도마”, “무능한 도덕주의자”, 혹은 “비겁한 이적 행위자”로 간주된다. 어쩌다 이런 변태적 상황이 벌어졌을까? 하나의 설명은 곽노현 사건이 선행한 노무현-한명숙 사건을 닮았다는 것이다. 이 현상적 유사성에 대중은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했다. 또 다른 요인은 10·26 보궐선거. 대중은 곽노현 사건이 행여 다 이긴 선거판에 재를 뿌리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80%는 2억원에 대가성이 있다고 대답했다. 반면 찬반이 50 대 50으로 갈린다. 이 두 수치의 괴리에서 이 문제가 윤리적 영역을 떠나 정치문제화했음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SNS 캠페인은 과연 성공적이었다. 이번 사건은 한명숙에게 무죄를 내렸던 재판부에 배당됐다. 만약 이 법원이 유죄를 선고한다면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자던 이들이 과연 그 결정을 존중할까? 물론 나는 ‘아니’라고 본다.
정의에서 게임으로
지금 대중이 하고 있는 것은 정의에 관한 ‘논의’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게임’, 즉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에 가깝다. 그들의 욕망은 2억원을 주고받은 행위가 윤리적, 법률적으로 ‘옳은지 따지는’ 데 있지 않다. 파일 배포와 트윗 멘션을 통해 그 행위를 윤리적, 법률적으로 ‘옳게 만드는’ 데에 있다. 영화의 스토리는 관객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나 게임의 스토리는 참여자들의 인터랙션에 따라 달라지지 않던가.
행위의 위법성이나 도덕성에 관한 판단은 법원에서 객관적 사실과 진술의 정합성에 따라 내리는 것. 대중이 특정한 믿음을 중심으로 뭉친다 해서 없던 사실이 생기거나, 진술에 정합성이 더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대중이 할 수 있는 것은 검찰이나 언론의 그릇된 행태를 비판하는 것 정도다. 하지만 설사 검찰이나 언론이 잘못했다 해도, 거기서 곽 교육감이 옳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진보를 자처하는 교수들이 쓴 글들을 읽으며 썩소를 머금는다. 옳지 않은 것을 억지로 옳게 만들려면 정의의 기준을 왜곡해야 한다. 그것을 곡학이라 부른다. 그들이 그 짓을 하는 이유가 대중의 분위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아세에 해당한다. 유치한 진영논리에 빠져 고딩 논술 수준도 못 되는 허접한 논리를 폈던 이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적과 싸우다가 적을 닮으려면 뭐 하러 싸우는가? 나 스스로 이미 적일 텐데.
법원의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사퇴하면 안된다고 한다. 하지만 사퇴는 판결 전에 해야 자발적으로 책임을 지는 도덕적 행동이 된다. 판결이 내려진 다음에 하는 것은 사퇴가 아니라 면직이다. 합법적인 것이 곧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법률적으로 허용되는 모든 것이 윤리적으로 정당한 것은 아니다. 무지막지하게 유죄냐, 무죄냐로 환원된 놀이 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그 두 극단 사이에 존재하는 윤리의 영역이다.
(아마도 참모진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곽 교육감은 도덕적 행동의 기회를 잃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법률적 처분뿐이다. 그에게 부디 행운이 있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