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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종호] 삶이 힘들 때, 현실의 괴물은 그렇게 등장한다
이화정 사진 오계옥 2011-10-07

<카운트다운>의 허종호 감독

주어진 시간 단 열흘. 차하연(전도연)의 간이식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남자 태건호(정재영). <카운트다운>은 이 긴박한 상황을 범죄스릴러에 녹여낸다. 채권추심원과 희대의 사기꾼의 만남. 여기에 피라미드계의 거물 조명석(이경영)과 옌볜 흑사파 두목 스와이(오만석)가 얽혀든다. 신예 허종호 감독은 장르적 감각을 십분 발휘해 제 잇속 차리기 바쁜 인간 군상의 아귀다툼을 발빠르게 포착한다. 범죄스릴러라는 장르적 특성, 인물간의 복잡한 관계, 영화적인 캐릭터의 특성을 보자면, 딱 최동훈 감독의 작품에서 오는 얼개가 그려진다. 그러나 멈추지 않는 카운트다운의 와중에 그는 눈 딱 감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당신이 상상했던 모든 틀을 깨는 예측 불허의 시도. 어쩌면 지금까지 전개해온 장르와 캐릭터를 모두 배반할 후반부의 반전. 허종호 감독의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다. 과연, 당신은 이 배짱 두둑한 신인감독의 방향에 동의할 텐가.

-영화의 출발점은 어디였나. =2∼3년 전 닥친 외환위기가 모티브가 됐다. 영화계도 한창 투자가 안될 때였고, 나 역시 그 여파로 준비하던 영화가 불발됐다. 당시 우리 동네에서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자살 시도를 한 사건도 있었다. 분위기가 그러니 장르영화를 봐도 가슴에 안 남더라. 현실이 이런데 이런 영화를 봐야 하나 싶더라.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있는 영화를 만들자 싶었다. 우리 아이가 세살 때였는데, 자고 있는 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아빠한테 필요한 건 반성이나 후회가 아니다. 관객의 심장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웃음)”

-영화 대사 아닌가. 채권추심원 태건호가 빚을 독촉하는 과정에서 채무자에게 ‘영화’라는 말만 빼곤 똑같은 말을 한다. =말이 안되는 것 같은데 곰곰 생각해보니 말이 되더라. 이런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싶었다. <카운트다운>은 그래서 엔딩 시퀀스를 제일 먼저 만든 영화다. 영화의 마지막에 중심이 되는 아빠와 아들의 관계를 가장 먼저 구상했다. 그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장르를 끌어온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결과 다소 예측 가능한 액션스릴러에서는 한참 벗어나는 무리수를 뒀다. 전반부를 형성하는 장르적 쾌감이 후반부에는 부성과 모성을 강조한 드라마로 전환된다. 의도를 떠나, 이질적인 게 사실이다. 이 선택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분명히 갈릴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확실했다. 그렇지만 난 어찌됐건 상업영화 감독이고 장르적 재미가 보장되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범죄 장르가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내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가 따지고 보면 다 이기적이다. 패자부활의 기회가 없고 생존이 힘든 한국사회에서 파생한 인간 군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를 드라마에 녹여 넣기는 힘들다. 게다가 내가 이 장르를 워낙 좋아해서, 그걸 바탕으로 잘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채권추심원과 희대의 사기꾼의 만남. 초반부 캐릭터들의 성격을 보자면 지극히 장르적인 캐릭터의 결합이다. =태건호는 미스터리한 인물이자 젊음의 활달함이 증발된 캐릭터였다. 채권추심원이라는 직업이 캐릭터와 맞닿더라. 코스닥 상장업체를 취재했는데, 폭력적인 건 빼더라도 그런 비즈니스가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과연 그 인물이 어떤 인물을 만났을 때 좀더 파괴적이고 극적일 수 있을까. 범죄드라마의 장르를 어떻게 더 재밌게 풀어나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사기꾼 차하연 캐릭터가 출발했다. 사실 차하연을 생각하기 전엔 몇 개월 동안 시나리오를 못 써서 애를 먹었다. 그러다가 사기꾼 캐릭터가 들어오니 모든 게 풀리더라. 건조한 태건호에게 강력한 파트너로 작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숨쉬는 것 빼곤 모두 거짓말인 여자, 팜므파탈적인 속성까지. 최동훈 감독의 영화 속 여성상이 가장 비슷하다고 할까. 범죄 장르의 열세와 함께, 한국영화에선 흔치 않은 여성 캐릭터라 기대가 가는 지점이다. =거짓말 같지만 차하연의 상당 부분을 실존 인물에서 따왔다. 형사들을 통해 취재하다 보니 실제 미스 춘향으로 미모를 이용해 남자들에게 사기행각을 벌이는 여자가 있더라. 차하연보다는 나이가 많은데, 성형을 하도 해서 삼십대 후반처럼 보인다더라. 그래서 수사를 하고 놓친 적도 있다고 한다. 영화 캐릭터로는 참고할 만한 캐릭터가 많지 않았다. 좀 비슷하다면 존 카사베츠의 <글로리아> 정도. 그런데 그것도 차하연과는 다른 것 같다. 실제 자료조사를 토대로 전도연이라는 배우에 살을 붙여서 만든 캐릭터다.

-두 악인의 결합이 영화를 이끌어 나간다.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만나 영향을 받는 대신, 이 경우엔 악의 충돌이 오히려 선을 불러일으키는 이상현상을 낳는다. =난 선한 계기는 신뢰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위한 무조건적인 감정이 있다면, 그 이면엔 분명 이기적인 계산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바친다, 헌신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돈이나 혹은 어떤 계산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이기적인 충돌을 거치다보면 누구나 걸림돌을 갖게 된다. 그게 가족이다. 아무리 쿨한 사람이라도 가족에게 당할 수는 없다. 참으로 징글징글한 관계다.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라는 뻔하고 상투적인 단어들을 모두 적용시킬 수 있는 집단이 바로 가족이다. 정말 이기적인 사람에게서 이런 면모를 끌어낸다면 더 큰 증폭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들에 대한 죄의식을 떠안은 태건호의 변화는 차치하더라도, 차하연이 가지는 심경의 변화는 좀 급작스럽다고 느껴진다. =난 오히려 그 정도 선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사건처럼 딸이 위험에 빠지는 등 격한 일을 겪게 되면 변화도 크게 마련이다. 단, 말미에 딸과의 행동에서 주의를 했다. 갑자기 딸과 손을 잡으면 닭살이 돋기도 할 텐데 캐릭터를 훼손하지 않는 정도로 기존 성격을 유지하려고 했다.

-다운증후군 아들을 둔 태건호 가족에게서 ‘가족’이란 상이 그려지고 있는데 폭력적인 면모가 부각된다. 장애우를 둔 가정을 모델로 할 때 상당히 민감한 부분이 될 수 있다. =오히려 보편적으로 접근했다. 사회가 어려워지면서 개인의 삶이 힘들어졌을 경우를 상정해봤다. 현실의 괴물은 그렇게 등장한다. 태건호가 욱하는 마음에 아이를 크게 비난하거나 혼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건 장애인을 자식으로 둔 부모만 느끼는 게 아니라 보통의 가정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누구나 자신의 삶이 불안하고, ‘부모’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개에게 쫓기는 장면은 비극을 강조하고자 극화된 측면이 있다. =리얼리티에 집착하는 편이라 과연 그 정도 쫓고 쫓기는 게 가능한가 따져봤다. 물론 지금의 추격장면은 영화적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 좀 길어진 건 맞다. 그런데 실제로 아이가 물리고 도망가다가 또 물리는 사건이 있기도 했고, 어느 정도 리얼리티는 담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반부를 지배하는 장르적 속성 때문에, 이 영화의 강점 역시 추격전에서 찾게 된다. 액션스릴러의 재미를 줄 수 있는 여러 장면들을 구상했는데. 재래시장 카체이싱 장면이 대표적이다. =스토리가 스타일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어떤 스타일이라고 규정하고 장면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한다. 재래시장 장면도, 대놓고 시장으로 차가 진입하는 게 아니라 차가 왜 그 장소로 들어갔고, 들어갔을 때 결과적으로 어떤 효과를 낳을 수 있는지 고민하면서 구상했다. 백화점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차하연이 왜 그 공간에 들어가서 자신을 쫓고 있는 인간들을 따돌리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모든 행동에 개연성을 주려고 했다. 그게 없으면 관객에 대한 설득력도 당연히 감소할 것이다.

-첫 장편 연출작인데, 베테랑급 배우들과의 작업은 어땠나. 전도연은 신마다 감독과 함께 만들어가는 작업 형태의 장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충무로에서 연출부 생활을 오래해서 현장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조감독 때에 비하면 물론 감독이 가지는 중압감이야 더 컸지만. 배우와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난 배가 산으로 가게 만드는 연출가가 아니다. 시나리오가 확고했고, 장면마다 가이드라인이 있었다. 영화는 결국 쓴 시나리오보다 잘 만들어야 한다. 기본적인 시나리오를 토대로, 같이 하나하나 만들어갔다.

-단편 <뉴스데스크> <승부>를 연출한 게 2001년의 일이니, 입봉하기까지 시간이 꽤 길었다. =학교 졸업하고 바로 충무로에서 일해서 그런지 개인적으로 아주 힘들단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연출부 생활을 5년 정도 했고, 그 뒤론 영화사 봄과 영화를 준비했다. 28살 때 써두었던 작품이었는데, 생방송 TV드라마를 만드는 것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앞서 말했듯이 그게 잘 안됐다. 시나리오 습작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웃음)

-영화를 시작한 건 언제인가. =1998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갔다. 이정범(<아저씨>), 정길영<(우리동네)>, 여인광(<아이스케키>) 등과 같이 공부했다. 영화야 좋아했지만 평범한 선을 넘진 않았다. 그런데 군대 있을 때 영화를 본격적으로 하고 싶다는 결심이 섰다. 감독이 괜찮을 것 같더라. 어릴 때라 그런지 몰라도, 막연히 예쁜 여자가 많은 직업을 선택해야지 했고, 군대 갔다 와서 원래 다니던 학교 그만두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다.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다. (웃음) 감독이란 직업이 프리 프로덕션 작업부터 결말이 나기까지 엄청난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더라.

-대중 장르에 사회적인 시선을 교차시켰다는 점에서 차기작의 방향성을 짐작게 한다. =나 역시 사회구성원이기 때문에 그 문제에서 벗어날 순 없다. 그런데 너무 직설적으로 가기보다 우회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를 보고 많이 깨닫는 편이다.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지.

-그게 어떤 건가. =절대 근처에 가지 말아야겠다! 나랑은 룰이 다르다! 다행히 대중 장르를 선호하는 편이라 템포나 리듬감에서는 자신있다. 중요한 건 이야기다. 이야기가 재미없으면 좋은 이야기라도 안 할 거고, 아무리 허무맹랑하다 싶어도 좋은 이야기라면 만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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