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뮤즈를 예술가의 희생양이라고 불렀나. 여기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부를 만큼 아끼는 배우가 죽자 5년 동안 신작을 내놓지 못한 감독이 있다. 한국 관객에겐 <유미카> <화이트>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AV연출자이자 다큐멘터리 감독 히라노 가쓰유키다. 90년대 일본 AV영화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한명이었던 그의 ‘뮤즈’, 하야시 유미카는 2005년 사고사로 세상을 떠났다. 히라노 가쓰유키 감독은 5년간의 슬럼프를 딛고 하야시 유미카를 떠나보내는 작품이자 감독으로서의 자신을 성찰하는 다큐멘터리인 <감독실격>을 완성해냈다. <에반게리온>의 제작사인 스튜디오 카라의 첫 실사영화로도 화제가 된 이 영화에 대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찾은 히라노 가쓰유키 감독에게 물었다.
-허리가 아픈데도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달리며 절규하는 장면으로 영화의 시작과 끝을 맺는다. =<감독실격>의 편집 도중 추가로 촬영한 장면이다. 5년 만에 만드는 영화라 시작과 결말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유미카에 대한 내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르는데 평범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유미카가 살아 있었다면 가장 보고 싶어 했을 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유미카는 나에게 늘 화를 내거나 소리지를 때 왜 카메라를 꺼버리냐고 구박했으니까. 그녀에게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지?” 묻는 마음으로 자전거신을 촬영했다.
-안노 히데아키가 제작을 맡고 애니메이션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던 스튜디오 카라에서 첫 실사영화로 이 영화를 제작했는데, 어떤 인연인가.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역시 유미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던 1997년작 다큐멘터리 <유미카>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14년 전, 안노 히데아키가 <유미카>를 극장에서 보고 굉장히 감동을 받았다며 나를 찾아왔다. 자신은 애니메이션은 만들 수 있지만 이런 영화는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것 같다며 <유미카>를 칭찬했다. 그 작품을 계기로 굉장히 친해져서 오랜 친구로 지내고 있던 차에 내가 <감독실격>의 아이디어를 얘기하자 도와주겠다며 그가 직접 제작을 맡겠다고 했다.
-영화를 보고 얘기를 들을수록 하야시 유미카란 배우가 궁금하다. AV영화계에서 그녀는 어떤 존재였나. =90년대를 풍미했던 배우다. 보통 AV영화계에 들어온 여배우는 2~3년 반짝하다 사라지는 이들이 대부분인데 유미카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입지를 지켜냈다. 그렇게 AV배우로 유명세를 얻으면 원하는 작품만 출연할 수도 있었을 텐데 유미카는 저예산 포르노든 유명 감독의 포르노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출연했다. 미소녀 이미지인데도 심한 노출을 꺼리지 않았고 정사장면도 실제로 하는 등 몸을 사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사랑을 받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로 하야시 유미카를 뮤즈로 삼은 이유가 있나. =AV에도 여러 장르가 있는데 내가 선호하는 연출 방식은 다큐멘터리로 여배우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여배우들을 찍었는데 대부분이 내가 갑자기 카메라를 들이대면 “잠깐만, 나 화장 좀 하고”라며 손으로 촬영을 막곤 했다. 유미카는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든 말든 화장을 했든 안 했든 꿈쩍도 안 했다. (웃음)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서 나와 호흡이 잘 맞았던 것 같다.
-하야시 유미카에 대한 생각을 내레이션이 아니라 자막으로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와 유미카의 사적인 관계와 이야기를 담은 부분이 많지만 내가 내레이션으로 설명해버리면 관객이 내 감정에 치우쳐서 유미카를 볼까봐 걱정이 됐다. 좀더 드라이하게 관객에게 유미카와 나의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다.
-카메라를 들고 하야시 유미카의 집을 찾은 당신은 우연히 그녀의 죽음을 촬영하게 된다. 이후에 하야시 유미카의 어머니가 당신을 용의자로 의심하기도 하는데, 심정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죽어 있는 그녀를 봤을 때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촬영을 할 상태가 아니었지만 현관 입구에 놓아두었던 카메라가 녹화 중이었기에 내 의지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카메라의 기록에 의해 유미카의 죽음이 화면에 담겼다고 보는 게 맞다. 유미카의 어머니와는 이후 그녀의 죽음에 관련된 특정장면을 영화에 사용하지 않겠다는 계약서를 쓰고 관계를 회복했다.
-이 영화가 하야시 유미카를 다룬 당신의 마지막 영화가 될까. =그렇다. 여전히 내 머릿속을 맴도는 유미카를 놓아주고, 그녀의 성불을 바라며 만든 영화니까. 영화를 편집하면서도 내내 유미카가 편하게 저세상으로 가길 빌었다. 앞으로는 극영화 연출에도 도전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