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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목할 만한 이야기꾼을 발견하다

추리를 동력으로 한 법정물 <의뢰인>이 지닌 장르영화로서의 매혹

한국영화에서 법정물은 전통을 갖고 있거나 인기를 얻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영화 한편이 이 척박한 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의뢰인>이다. 한국 최초의 법정스릴러물이라고 자부하는 <의뢰인>은 호화 배역진과 가능성 있는 감독 그리고 탄탄한 기획력의 삼박자를 갖추고 있다. 물론 과감하게 시도된 만큼 단점이 없을 순 없지만 기본적으로 매력적인 시도다. <의뢰인>이 이끄는 법정으로 가보자.

법정에서의 시시비비를 주요 소재로 취한 한국영화가 그동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얼마 전에도 미궁의 살인사건을 사회적 시선에 기초하여 바라본 <이태원 살인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러니 <의뢰인>의 제작진이 “한국 최초의 법정스릴러”라고 표방할 때의 방점은 법정을 무대로 한 본격적인 첫 번째 영화라는 뜻보다는 법정을 장르적으로 적극 활용한 첫 번째 영화라는 점에 있는 것 같다. 그 강조는 <의뢰인>이 철저하게 장르영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확실한 캐릭터 구축이 큰 장점

할리우드영화에서라면 이 장르물의 전통은 오래되었고 그만큼 폭넓고 대중적이다. 시드니 루멧이 대표적인 걸작을 남겼고 그 밖에도 많은 할리우드영화들이 뛰어난 법정물로 만들어졌다. 한편 법정을 배경으로 하진 않았으나 단연 그 분위기를 훌륭하게 묘사해낸 근래의 영화로는 법정스릴러의 대가 아론 소킨이 각본을 맡고 데이비드 핀처가 연출을 한 <소셜 네트워크>가 있다. 동시대의 미국 드라마로 시선을 옮긴다면 그 대중성은 더 강력하다. 근래 몇년간 방영된 드라마만 놓고 보아도 <보스턴 리갈> <굿 와이프> 등 흥미로운 작품들은 차고 넘친다. 법정물이라는 이 장르는 자유롭게 서브 장르를 형성하며 변주해와 때로는 사회성을 담보한 인간드라마로, 때로는 코믹한 시트콤으로, 때론 빠르고 냉철한 스릴러로 다종다양하다. 그중에서도 <의뢰인>은 강력하게 추리극과 결합하고 있다.

한 평범한 여인이 살해당했다. 그녀의 남편이 살인자로 지목된다. 영화현상소 직원 한철민(장혁)이 그 용의자다. 이때 영화는 남편과 아내의 이야기를 밀어붙이지 않고 그 밖으로 나와 그를 변호하는 변호인과 그를 구속하려는 검사쪽의 대결구도로 나아간다. 한철민의 변호는 당대의 스타 변호사인 강성희(하정우)가 맡는다. 안민호(박희순)가 강성희에 맞서는 검사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둘 사이의 치열한 밀고 밀리기의 싸움이 전개된다. 둘은 엎치락뒤치락한다. 재판장에 압력을 행사하려 했던 검사쪽의 계획은 이 사건을 배심원 재판으로 이끈 강성희의 계획에 말려 수포로 돌아간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인 CCTV 자료화면을 쥐고 있는 안 검사는 변호인쪽을 다시 밀어붙인다. 이 과정에서 하나둘씩 비밀이 모습을 드러내고 사건의 국면은 그에 따라 바뀐다.

영화는 일단 추리극을 이끄는 캐릭터를 확실하게 세운다. 극을 이끌어가는 매력적인 변호사 강성희가 대표적이다. 하정우는 예컨대 할리우드영화와 미국 드라마에서라면 자주 접할 수 있었던, 과거의 비밀도 있고 사생활에서는 좀 불량기도 있어 보이는, 하지만 자기의 일에서만큼은 정의를 목숨처럼 여기는, 다중적이라 더 매력적인 캐릭터로 확실하게 자리잡는다. 그가 그렇게 큰 축을 맡고 있을 때 그 맞은편의 안 검사는 성격은 대쪽 같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강 변호사에게 콤플렉스를 느끼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 캐릭터 구축의 확실성이 이 영화의 크나큰 장점이다.

다만 <의뢰인>이 추리를 동력으로 한 법정물이라고 할 때, 이 영화의 장르적 매력을 위태롭게 만드는 것 중 한 가지를 말할 수는 있겠다. 예컨대 우리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 사건의 진위를 가려줄 아주 중요한 증인으로 한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이 아이는 청각장애인이다. 영화의 언론시사가 있던 날 한 관객은 이 소년의 등장에 “저 애가 뭔가 할 것 같아”라고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건 아이의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장애가 이 영화의 증언에 결정적일 것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아이는 영화에 결정적인 인물이지만 아이의 장애는 영화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바가 없다.

감독은 “이 영화의 숨겨둔 주제”와 소년의 장애가 연관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 친구는 그렇게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청각장애인이다. 가장 결정적인 증언은 법정에서 이뤄지는 게 아니라 법정 바깥에서 말 못하는 아이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소년이 통역인을 대동하고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감독의 말에 대한 반박은 가능하다. 중요한 건 아이의 장애라는 일종의 이 의도치 않은 맥거핀이, 영화에서 사회적 의미의 접합으로도 실패하고 장르적 흐름에도 마찰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건 그로써 관객의 주의가 흐트러진다는 사실이다.

감독은 일찌감치 이 영화를 스토리텔링에 관한 것으로 규정짓고 검사와 변호사를 일종의 스토리텔러라고 말해왔다. 이 스토리텔러들의 목적은 우리를 서로 자기 편으로 설득하려는 것이다. 훌륭한 추리극은 관객이 스토리텔러의 화법 그 바깥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마침내 스토리텔러의 화법에 홀려 그 주인공들에게 졌다고 관객이 인정하도록 만들어야만 칭송을 얻는 아이러니한 장르다. 즉 추리극은 추리극의 관객을 관전하는 자리가 아니라 설득당하는 자리에 고정시켜놓아야 한다. 말하자면 배심원의 자리에 관객을 묶어두어야 한다. 그런데 <의뢰인>은 이상의 예와 유사한 몇 가지로 그 주의력이 종종 깨지곤 한다.

검사와 변호사가 스토리텔러라면

그럼에도 <의뢰인>의 매우 경쾌하고, 적어도 동어반복 없이 앞으로 치고 나가는 이야기의 속도감과 모양새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준다. 그게 이 영화의 장르적 신선도를 보장한다. 그러니까 전작 <약탈자들>에서 괄목할 만한 자질을 보여준 감독 손영성은 이미 구조를 갖춘 시나리오에 자기 화법의 정서를 넣는 쪽을 택하는 <의뢰인>의 연출 과정에서 절반의 성공을 거둔다. 이미 지적한 캐릭터 구축과 함께 법정 공방전에서의 균형감각, 주·조연들의 적절한 배치 등으로 이 영화의 매력적인 관람 포인트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법정 장르물이 그동안 번성하지 못한 데에는 한국 법정의 현실적 모델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판결까지는 아니더라도 권고의 역할까지는 하고 있는 형태로 미국의 배심원제가 한국의 법정에도 등장하자 <의뢰인>과 같은 기획이 가능해졌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발빠르게 현실적 모델을 장르적으로 타진하는 기민함을 보였다는 점이 돋보인다. 완전한 성공이라 말하기 어려워도, <의뢰인>은 기획 면에서 신선했고 연출의 면면에서 가능성을 남겼다. 구태의연함을 벗어난 장르영화로서의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이 법정 공방전을 우린 방청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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