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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취향] ‘꼴빠’의 탄생
신두영 2011-10-07

취향은 유전되기도 한다. 지난 일요일 새벽 AC밀란과 나폴리의 이탈리아 세리아 축구를 보다가 어린 시절 기억의 조각들이 떠올랐다. 일요일이면 아버지는 동네 대중목욕탕에 나를 데리고 갔다. 사람 많아 북적거리는 그곳이 싫었지만 목욕을 끝내고 마시는 갈색병의 맥콜은 좋아했다. 한쪽 구석의 높은 곳에 설치된 텔레비전에는 늘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 중계가 흘러나왔다.

어느 날 아버지는 목욕탕이 아닌 사직구장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집 앞에서 111번 버스를 타고 사직동에 내리면 통닭 냄새가 코를 찌른다. 사직구장에 이르는 길엔 통닭집이 줄을 잇는다. 통닭이 너무 먹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매표소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옆을 보니 긴 끈을 이용해 아래층에 있는 아저씨가 입장해 있는 2층의 아저씨에게 가방을 올려 보내고 있었다. 출입구 안내판에는 ‘병 소주는 반입 안된다’고 적혀 있다. 아버지의 팩 소주는 무사통과였던 것 같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검표를 하면 사람들은 무작정 뛰었다. 영문을 몰랐던 나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달렸다. 조금이라도 그라운드에 가까운 좋은 자리에 앉기 위한 몸부림이다. 컴컴한 실내를 통과해 관중석 출입구를 지나자 인조잔디의 초록색 그라운드가 펼쳐진다. 그때까지 그렇게 넓은 공간을 본 기억이 없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본 기억도 없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랄까. 관중석에 들어설 때의 그 순간은 그전까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상한 짜릿함으로 내 머릿속에 각인됐다.

영국 런던을 연고지로 한 축구클럽 아스날의 팬이 주인공인 닉 혼비의 자전적 소설 <피버 피치>를 원작으로한 동명의 영화에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어린 주인공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지금은 사라진 하이버리구장의 그라운드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주위가 밝아지고 엄청난 함성이 귀를 때리는 화면 속 그 이미지는 20여년 전 내가 경험한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나는 아버지가 사준 우동을 먹으며 말했다. “아빠, 다음에 또 오면 안되나?” “그래, 알았다.” 아버지는 무심하게 말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때는 관중석에서 담배를 피워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추석, 고향집 거실에 누워 야구 중계를 봤다. 아버지가 다가와서는 양승호 감독의 욕을 하며 손아섭 칭찬을 하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과 같은 ‘꼴빠’가 되지 않았을 거다. 아버지에게 감사해야 할까. 흔하고 흔한 모태 롯데 팬의 탄생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