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독특한 느낌을 풍긴다. 어딘가 속해 있는 듯한, 그래서 여유가 배어나오는 듯한. 장소는 사람을 품고 역으로 사람은 장소에 의미를 더한다. 고갱과 타히티, 도스토예프스키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윤선도와 보길도, 비트겐슈타인과 비엔나, 가우디와 바르셀로나, 마키아벨리와 피렌체… 그 리스트는 끝이 없다. 그러나 대도시가 늘어나고 인간의 삶이 급격히 노마드화하는 요즘, 장소와 인간과의 끈끈한 교우가 오래 지속되기를 기대하기란 힘들다. 요즘 인간들은 도대체 한 군데 머무르지 못한다.
점차 과거지사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이 특별한 관계 또 하나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두어달 전의 일이었다. 졸업전 심사로 찾아갔던 이화여대의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잉마르 베리만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2007년 세상을 떠난 그는 생애의 상당 부분을 발트해의 작은 섬 포로(Faro)에 칩거해 살았다고 했다. 촬영을 위해 처음 섬을 찾았을 때부터 계산하면 무려 40여년에 달하는 긴 시간이었다.
그 섬의 해변 풍경을 담은 파노라마 사진이 둥근 공간을 만들고 서 있었다. 황량한 풍경이었다. 세찬 바람이 불고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을 것 같은 바닷가. 마음속에 어떤 울림이 왔다. 마침 사무실 일로 스웨덴 출장이 잡혀 있었다. 이 정도면 인연 아닌가. 나는 그 섬에 가기로 했다. 솔직히 베리만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다. 그의 영화 <페르소나>를 본 기억이 있는 정도였다. 그러니까 나는 사진 한 장에 꽂혀서, 잘 알지도 못하는 영화감독에게, 그나마 완전히 거꾸로 접근하려는 셈이었다.
스톡홀름에서 버스로 니네스햄까지, 거기서 페리로 고틀란드 도착 뒤 다시 버스와 페리로 찾아가는 긴 여정이었다. 이렇다 할 사전정보 없이 그냥 가서 부딪히기로 했다. 섬의 크기로 보아 자전거를 빌리면 좋을 듯했다. 대강 섬 가운데에서 버스를 내렸다. 섬의 이름이 거기에서 왔는지 지명이 포로라 했다. 거기엔 교회가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베리만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다(무모함의 승리!). 자전거 빌리는 곳까지는 한참 걸어가야 했다. 주저없이 히치하이커로 변신하여 차 한대에 올라탔다. 느긋해 보이는 중년 남자는 자기 부인이 베리만센터에서 일하니 찾아가보라고 했다(이어지는 무모함의 승리!).
사진에서 본 그 바닷가가 거기 있었다. 길게 이어지는 해안에는 때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베리만은 그 일대에서 많은 영화를 찍었다고 했다(무모함 연전연승!). 길을 잃어 예정보다 자전거를 오래 탔으나 그만큼 이 섬의 구석구석을 즐긴 셈이었다. 일본 시라카와고의 걋쇼즈쿠리와 같은 전통 건축도 있었고 풍차도 보였다. 길게 뻗은 돌담장은 제주도를 생각나게 했다. 작지만 풍광이 다채로운 섬이었다. 베리만의 자발적 유배지는 단순한 곳이 아니었다.
1. <포로 다큐멘트>의 장례식 장면. 2. 베리만의 무덤. 3. 베리만의 작업 노트. 4. 잉마르 베리만 센터. 5. 베리만 집의 대문. 6. 무덤 약도.
그의 무덤은 교회 옆, 발트해가 바라다보이는 볕 잘 들고 바람 잘 부는 곳에 있었다. 처음에는 십자가만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볼록한 자연석이 놓여 있다. 위치를 보니 그가 만든 자기 동네의 기록인 <포로 다큐멘트>(Faro Document)의 장례식 장면에서 카메라가 있었음직한 곳이다. 우연이라 쓰고 인연이라 읽고 싶은 장면이다.
무덤에서 길을 건너 조금만 걸으면 바로 베리만센터가 있다. 낡은 건물을 개조해 만든 것인데 건축 잡지에 나올 리 없는 소박한 모습이었다. 전시 내용도 화려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많은 사진과 작업 노트, 영화 포스터 등이 있었다. 내 관심을 가장 끈 것은 스케치북이었다. 스케치라기보다는 다이어그램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그림의 도상이 아닌, 각 장면들의 아이디어에 몰두했다는 느낌이었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이제 그가 살던 집을 찾아갈 차례였다. 포로 주민들은 베리만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그의 집이 어디 있는지 잘 알려주지 않는다고 들은 바 있었다. 이런 말을 하는 나에게 베리만센터의 직원은 피식 웃더니 지도에 자세하게 그려주었다. 누군가는 신화를 만들려고 하고 또 누군가는 그런 것은 필요없다고 하는 것 같았다. 길이가 50여 미터에 달한다는 그의 집은 바닷가에 면해 있으며 대문이 잠겨 있어 안을 볼 수는 없었다. 사후에 경매로 나왔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예술가들을 위한 레지던스가 되었다는 설까지 들었는데, 이제 나에게 그런 것은 의미가 없었다. 다만 소나무가 울창한, 그래서 강릉의 해변을 연상케 하는 그 한갓진 오솔길을 늦은 오후에 자전거로 하염없이 달렸던 기억만이 소중하다.
귀국하여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아직도 나에게 그의 영화세계는 대부분 미지수로 남아 있다. 베리만센터에서 사온 <포로 다큐멘트>를 여러 번 보았을 뿐이다. 그가 직접 주민들을 인터뷰하고, 섬이 직면하고 있던 현실의 어려움과 사회적 모순을 이야기한 이 기록영화는 그나마 그의 대표작도 아니다. 구원이나 실존과 같은 묵직한 철학적인 주제로 알려진 그의 극영화들과는 달리 사회문제를 다룬 작업의 성격이 강하다. 다만 인터뷰를 진행하는 그의 솜씨가 일품이었다. 예리한 질문을 던지면서도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어 스스로 말하게 하고 있었다.
무모함이 마지막 승리를 거두려는가? 7, 8월의 베리만 회고전에 이어 <가을소나타> <외침과 속삭임> 등 그의 영화를 올 연말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한다. 우연히 시작된 인연이 당분간 더 지속될 모양이다. 삶은 서로 다른 진폭과 주기를 갖는 무수한 파동들의 푸리에 변환(Fourier Transformation)과도 같다. 이것은 역으로 불규칙하게 보이는 삶의 곡선 속에 수많은 미세한 흐름의 질서가 자리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만남은 이전에 시작되었고, 이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다만 나는 그의 영화를 본격적으로 보기 전에 자서전 <마법의 등>(Magic Lantern)을 먼저 읽게 될 것 같다. 그래서 그에 대한 완벽한 거꾸로의 접근을 완성해볼 생각이다. 산에 오르고 나면 걸어온 길이야 대수로울 것이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