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강이다. 임우성 감독의 <채식주의자>는 소설가 한강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다. 10월 개봉예정인 <흉터>도 한강의 소설집 <내 여자의 열매>에 수록된 <아기부처>가 원작이다. 언뜻 생각하면 임우성 감독은 <채식주의자>를 끝내고 <흉터>를 만든 것 같지만 사실은 <흉터>를 먼저 촬영했다. <채식주의자>에 밀려 완성이 늦어진 <흉터>는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영화제 자벨테기 신인감독 섹션에 초청됐다. 완벽주의자인 뉴스앵커 상협과 동화 일러스트레이터 선희 부부의 복잡미묘한 사랑을 그린 <흉터>는 원작 소설을 충실히 영상으로 담아내고 인물의 심리를 세밀히 묘사한다. <채식주의자>에서 볼 수 있었던 임우성 감독의 색깔이다. 한강의 소설은 임우성 감독에게 어떤 매력으로 다가왔을까. 스페인 출국을 앞둔 임우성 감독에게 한강의 소설을 영화로 옮기는 작업에 대해 물었다.
-한강의 소설을 다시 영화로 만들었다. =2008년에 뒤늦게 동국대 대학원에 들어갔다. <흉터>는 대학원의 특성화사업인 시나리오 공모전에 지원했던 작품이다. 3천만원 정도 지원해주는데 지원금액이 크지 않으니 작은 이야기가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아기부처>라는 작품이 머리에 스쳤다. 부부 중심의 실내극처럼 해볼 수 있겠다 싶었다. 2005년부터 <채식주의자>에 매달려 있었으니 <흉터>는 갑작스러운 기획이었다. <채식주의자>가 같은 해에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을 받게 되면서 <흉터>의 촬영만 해놓고 이틀 쉬고 <채식주의자>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갔다. <채식주의자>로 부산영화제, 선댄스영화제에 다녀오면서 1년 지나고 다시 <흉터>를 편집했다. 도 닦는 마음이랄까. 최종 완성까지 2년이 걸렸다. <흉터>를 마무리짓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못 넘어갈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한강 소설 연작이라고 보기는 어렵겠다. =사실은 3부작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한강 소설가가 서울예대 교수인데 내가 서울예대에 출강할 때 몇번 뵌 적이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3부작으로 해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하더라. 그러나 지금은 계획이 없다. 다른 일들이 있다.
-소설을 꼼꼼하게 영화로 옮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감독 입장에서 억울한 부분이 소설의 영화화가 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영화평론가가 <채식주의자> 때 쓴 글에서 영화는 소설의 비지정 영역을 다 지정해야 한다고 했다. 무슨 말이냐면 소설에서 묘사한 것들을 독자들은 모두 다르게 상상하는데 영화는 그 상상 가운데 어떤 하나를 지정해야 하는 작업이라는 말이다. “그 여자의 콧날은 날카롭고 인상이 날카로웠다”라는 묘사가 있다면 여기에 해당하는 배우를 지정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의상, 미술 등 하나하나 다 지정해야 하는 힘든 작업이다.
-<흉터>에서는 선희 역을 맡은 배우 박소연의 역할이 크다. =<흉터>를 시작할 때만 해도 내가 유학 다녀온 지 얼마 안되고 충무로의 연출부 경험도 없어서 스탭들 소개로 박소연씨를 알게 됐다. <채식주의자> 때 채민서씨가 캐스팅되기도 전에 살을 빼고 있었던 것처럼 박소연씨도 그 캐릭터를 간절히 원했다. 조금 고민하고 캐스팅을 결정했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다. 아픈 연기를 할 때는 정말 아프기도 했다. 창백한 얼굴이 되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빙의됐나 싶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원작을 읽어보니 매우 꼼꼼하게 소품을 활용한 것이 보이더라. 이를테면 주인공 선희의 어머니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암시하는 한복 액자 같은 것들 말이다. =<흉터>는 친절하게 찍고 싶지는 않았다. 소설에서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작가가 신이다. 그런데 <흉터>의 인물은 내가 만들지 않았다. 선희라는 여자를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계속 공부하고 관찰하는 입장이었다. 이런 식으로 콘티도 짜고 카메라도 사용했다.
-유독 해외영화제에서 인기가 많다. =<흉터>는 부산영화제에서 초청을 못 받고 산세바스티안에서 초청받았다. <채식주의자>는 처음부터 해외에서도 충분히 공감할 주제라는 걸 알았다. 반면 <흉터>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굳이 내 영화가 해외영화제에 초청되는 이유를 꼽자면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그때 본 영미권 영화의 스타일이 은근히 작품에 묻어나는 게 아닐까 싶다.
-상업영화에 대한 욕심은 없나. =영화를 만드는 목적이 중요한 것 같다. 만약에 30억원의 상업영화를 한다면 30억원 정도는 벌어야 하는 의무가 있지만 <채식주의자>나 <흉터>에서는 그런 의무가 없었다. 그래서 깊이있는 얘기를 할 수 있었고 단 한컷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완전한 자유가 없을 것 같다. 저예산만 할 수는 없지 않나. 더는 못한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