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10억원을 준비하지 않으면 한국대교를 폭파하겠다.’ 테러리스트의 범죄 예고 시한이 10분 남은 상태에서 비상대책위원회가 소집된다. KBS <개그콘서트>의 새 코너 ‘비상대책위원회’는 고위 공직자들이 위기 앞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어떤 궤변을 늘어놓는지를 풍자한다. 경찰청장으로 짐작되는 비대위 본부장 김원효는 늘 “야 안돼애~”부터 시작해서 일을 진행할 수 없는 오만 핑계를 들어가며 타박을 놓고, 군인인 소장 김준현은 “지금부턴 내 지시에 따른다!”고 소리치더니 결국 “이거 예전이랑 다르네. 안돼, 사람 불러야 되겠네”로 마무리하는 식이다. 급기야 2분 남기고 나타난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앞두고 5초 남은 시간을 쪼개 얼굴에 미스트를 뿌린다. 오랜만에 데굴데굴 굴러가며 웃었네.
그런데 이 사람들 설정은 고위 공직자인데 가만 보면 평범한 중년 아저씨의 디테일을 갖고 있다. 당장 다리를 통제해야 한다는 보고를 받은 김원효는 통제에 관련된 청장이며 장관들, 불편에 항의하는 시민들 그리고 그 틈을 비집고 나타난 뻥튀기 장수까지 등장시켜 자신의 입장을 대입하는 상황극에 심취한다. 이거 어디선가 자주 본 풍경이다! 호프집이나 포장마차에서 본의 아니게 엿듣던 아저씨들의 일인극 아닌가. 아저씨들은 상황 요약보다 재연에 열을 올리는데 이때 연기의 중점은 위계질서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설정이다. 내가 모시는 분과 나를 모시는 사람 사이의 나,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 글쎄 이러저러해서 내가 ‘이사님 이건 곤란합니다’ 하니까 이사님이 ‘김 부장이 이제까지 담당이었으니 마무리를 잘하라고’ 하시는 거야. 그래서 내가 ‘예 알았습니다. 이사님’ 하고 나왔지. 그런데 이번엔 내 후배놈이 나를 찾아왔어. ‘형님, 저 오늘 소주 한잔 사주십시오’ 하는데….” 이런 일인극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유장한데 듣고 있는 동년배 남자들은 또 굉장히 몰입한 분위기다.
역시 변수에 취약한 남자 김준현 소장은 지리멸렬한 판을 일소하겠다고 일어나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타입이다. 자기가 다 해결한다고 의욕적으로 나서지만 막상 변수가 발생하면 ‘이건 되는 일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어물쩍 발을 뺀다. 여기서의 디테일은 자신이 알던, 혹은 활약하던 당시의 상황과 다르기 때문에 지금은 여기 있는 당신들은 물론이고 나조차도 해결할 수 없다는 뉘앙스에 있다. 폭발물에 설치된 시계의 째깍째깍 소리를 듣고 위치를 찾으라고 소리쳤던 김준현. 그는 ‘전자시계’라는 보고를 듣고 “그 시계 어디 거래? 스위스? 거봐, 스위스, 스위스 시계 잘 만들지. 나 때는 소련제인데 그건 째깍째깍 소리 잘 났지”라며 느물느물 부언한다.
디테일을 잡아 부풀리는 <개그콘서트>의 귀신 같은 솜씨 덕분에 낄낄 웃을 수 있었지만 일상생활에서 이런 자리에 놓이면 스트레스가 꽤 크다. 얼마 전 모 언니를 만나 한참 불평을 늘어놨더니 그분은 마치 관음보살 같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들을 조망할 수 있으면 대처할 수 있고, 타입화할 수 있으면 웃을 수 있지.” 으악 깜짝. 이것이 다년간 수많은 ‘갑’을 상대하고 조율했던 능력자의 내공인가! 어딘가에서 이런 고수 아저씨가 툴툴거리는 나 같은 사람을 타입화하고 있을지도 몰라.
생각해보면 변수에 취약하고 위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년 아저씨들을 보고 몸을 뒤틀었던 나도 실은 매뉴얼에 취약하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식으로 인생을 돌파하고 재미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간 아니었던가. 부위가 다른 약점. 더 추가해 닮고 싶지 않다면 자세하게 캐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