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신체는 전쟁터다.” 미국의 예술가 바버라 크루거는 그 유명한 작품을 통해 신체의 정치학을 부각시킨 바 있다. 원래 이 작품은 여성의 출산선택권을 주장하는 페미니즘 캠페인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크루거의 작품들은 크게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맴도는 듯하다. 신체의 정치성(“당신의 신체는 전쟁터다”), 응시의 권력(“당신의 응시가 내 옆얼굴을 때린다”), 상품시장의 논리(“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관점을 그대로 미용성형에 관한 담론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작가 미레이유 수잔 프랑세트 포르트는 세간에 ‘오를랑’(Orlan)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녀가 ‘성 오를랑의 환생’이라는 제목으로 실행한 엽기적(?) 퍼포먼스 덕분이다. 그녀는 1990년부터 창작의 일환으로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미용성형 수술을 받았으며, 그때마다 자신의 수술장면을 촬영하여 세계의 유수 갤러리에서 공개했다. 마취 상태에서도 맨 정신을 유지한 채 메스로 째진 자신의 신체를 바라보며 그녀는 수술대 위에서 라캉의 텍스트(‘거울단계’)를 읽었다.
퍼포먼스의 목적은 남성 화가들이 묘사한 여성미의 이상에 도달하는 데에 있었다. 이를 위해 오를랑은 보티첼리의 비너스로부터 턱을, 장 레옹 제롬의 프시케로부터 코를, 프랑수아 부셰르의 유로파로부터 입술을, 퐁텐블뢰 화파의 디아나로부터 눈을, 그리고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이마를 빌려왔다. 계획된 수술들을 다 마치면 그녀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이 미녀들의 신체를 종합한 아름다움을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건대 수술의 결과는 이 이론적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명화에서 신체부위를 따올 때, 그녀는 미녀들의 외모보다는 정신적 분위기에 더 주목했다. 따라서 그 부위들이 자기 얼굴 위에서 서로 어울리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아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게 현대예술의 특징. 오를랑이 수술의 전 과정을 촬영하여 공개한 것은 그와 관련이 있다. 수술 과정 자체가 작품의 일부였기에 당시 오를랑은 물론이고 메스를 든 의사들도 특수한 옷차림으로 마치 무대 위에서 공연하듯이 수술을 해야 했다.
신체는 전쟁터
왜 이런 퍼포먼스가 필요했을까? 퍼포먼스와 함께 발표한 선언(‘육욕예술선언’)에서 오를랑은 자신의 예술을 “기술의 가능성을 통해 실현된 자화상”으로 규정한다. 고대의 조각가들이 예술을 통해 미의 이상에 도달했다면 오늘날 대중은 기술을 통해 이상적 신체에 도달하려 한다. 신체는 더이상 고전적 의미에서 기성품이 아니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오늘날 그것은 “수정되는 기성품”(modified ready-made)이 되었다. 끝없는 변형과 이행의 과정 속에 놓여 있는 유목적 신체라고 할까?
오를랑은 자신의 퍼포먼스가 “공적 논쟁의 장소가 된 신체의 스펙터클과 담론에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여성의 신체에 칼을 대는 데에는 당연히 정치적 차원이 존재한다. 특히 페미니스트들에게 여성들의 미용성형은 남성의 권력을 마침내 여성의 신체에까지 각인하고 개입시키는 행위일 것이다. 오를랑에 따르면 “육욕적 예술은 여성주의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명시적인 고백에도 불구하고 성형수술 자체를 용인한다는 점에서 그의 퍼포먼스는 정통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육체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자는 주장은 여성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다. 가령 “여자는 역시 자연산이 예쁘다”고 했다가 구설수에 오른 어느 정치인의 의식이 특별히 여성주의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때문에 미용성형을 부정하느냐 긍정하느냐로 여성주의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신체를 ‘만들어지는 것’(factum)이 아니라 ‘주어진 것’(datum)으로 간주하는 태도 역시 어떤 관점에서는 보수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광수씨가 나보고 ‘보수적’이라 했던 것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남성이 표상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분열적이다. 그것은 마리아(성녀)와 막달라 마리아(창녀)의 두 극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남성주의적 태도는 “자연산” 밝히는 전직 여당 대표처럼 여성들에게 미용의 욕망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 “야한 여자” 밝히는 대학교수처럼 성형을 해서라도 내 눈을 즐겁게 해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육욕적 예술’이라는 명칭에서 보듯이 오를랑은 아름다워지려는 육체의 욕망을 긍정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작정 남성의 시각에 투항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 수술을 받는 자신의 신체를 과연 누구의 눈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것. 섹스어필을 목적으로 한 미용성형의 경우, 응시(gaze)의 주체는 물론 남성이다. 즉 그때 미용성형은 남성이 보기에 좋도록 여성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고통을 통해 여성의 신체는 타고난 원죄(?)를 씻고 깨끗이 정화된다. 이 종교적(?) 패러다임에 빠지지 않기 위해 오를랑은 일단 성형수술에서 고통을 제거하려 한다. “모르핀 만세!”(Vive la morphine!) “타도 고통!”(A bas la douleur!)
그렇다고 그가 ‘여성주의적’ 신체의 아름다움을 실현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성형수술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 내 신체가 잘려서 열리는 것을 고통없이 관찰할 수 있다! 내 자신을 내장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새로운 단계의 응시”. 오를랑은 수술대 위에 오른 자신의 신체를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가 말하는 “새로운 단계의 응시”는 발터 베냐민이 외과의사의 수술에 비유한 카메라 렌즈의 시각을 연상케 한다. 그것은 여성의 신체가 수술대에 오르는 현상을 바라보는 이 편견 없는 시각이다.
상품으로서 신체
“육욕적 예술은 미용성형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것이 반대하는 것은 미용성형을 지배하는 표준들이다.” 미용성형이 표준화되어 있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생산되는 신체가 이미 상품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표준화’는 기술복제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여성의 신체만이 아니라 남성의 신체도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미용성형은 더이상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취업을 위해서 때로 남성도 고객이 보기에 좋도록 제 신체에 칼을 대야 한다.
아홉 차례에 걸친 오를랑의 반복적 성형을 ‘억압된 것의 반복적 회귀’라는 강박증의 증세와 연관시키는 시도도 있다. 마치 해골을 보는 듯한 마이클 잭슨의 문드러진 코는 그 가설을 입증해주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사(死) 충동’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실패한 기술의 결과에 가깝다. ‘선풍기 아줌마’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비록 칼로 신체를 파괴(?)하는 것이라 해도, 반복적 성형의 욕망은 아래(‘죽음’)를 향한 충동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위(‘이상적 신체’)로 올라가려는 충동으로 보인다.
물론 ‘의식은 이상적 신체를 목표한다 해도 무의식은 신체에 반복적으로 칼을 대는 것을 욕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조차도 반복적인 성형은 고전적 강박증과는 다르다. 사회 속에서 억압되기는커녕 외려 자본과 기술에 의해 적극 권장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반복적으로 회귀하는 욕망은 더 이상 억압된 것이 아니다. 욕망의 영겁 회귀는 오늘날 차라리 자본이 순환하는 정상적인 방식이 되었다. 모르핀에 취한 성/창녀 오를랑의 신체는 그것을 증언한다.